미국 교외만큼 삶의 지독한 안정감과 권태감을 잘 나타내는 공간은 없다고, 젊은 미국 감독들은 말하곤 한다. 아!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그래서 하이틴들은 몰에서 난리를 피우고, 중년 부부들은 이혼을 하고, 노인들은 오래오래 산다. 반면 20대, 30대의 젊은이들, 특히 야심가들은 모두 메트로폴리스로 떠난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떠나려는 주디 베를린과 영화감독의 꿈을 좌절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데이빗. 이 둘은 공통점이 없다. 데이빗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섬약한 여피고 주디 베를린은 여러 가지 파트 타임 일을 하며 자신의 생활을 꾸리는 강인한 여자다. 다만 같이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점이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주디 베를린>의 배경은 뉴욕 근교의 롱아일랜드. 잘 가꾼 정원수 사이로 보이는 집들. 치안은 완벽하고, 길은 깨끗하다. 말하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식이 이 심심한 교외를 덮어오면서 현실은 몽환적 색채를 띠게 된다. 마치 우주의 무중력 상태에 감염된 듯 중년들의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지고,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또 데이빗과 주디는 일식이 내린 거리를 거닐며 점차로 서로를 발견해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