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함께 읽는 영화: 이태겸 감독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2021-02-10 11:00:00


2021-02-10

??정은이 건넨 선물이 아름답고 빛났기에
[함께 읽는 영화] 이태겸 감독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전주국제영화제 뉴스레터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비정기 코너 함께 읽는 영화가 지난 1월 28일 개봉한 이태겸 감독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유다인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정은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으며, 막내 역을 맡은 오정세 배우가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오디오클립 이화정의 전주가오디오 59회’에서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바 있는데요. 오늘은 기록노동자 희정의 시선을 빌어 한국 사회의 어두운 자리를 담담히 짚어낸 이 영화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기록노동자 희정의 시선으로 읽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해고란 ‘내’가 사라지는 일이다.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해고를 거부하고 회사와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이유를 물으면 “억울해서”라고 한다. 무엇이 억울한가. 그간의 ‘내’가 사라지는 일이 억울하다. 성실했던 나, 노력했던 나, 순진했던 나, 동료라고 믿었던 나, 회사와 자신을 공동 운명체라 여겼던 나. 해고 압박을 받는 순간부터 지금껏 살아온 내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직종,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이런 한탄을 한다. 당신이 우리 회사에 있기엔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서 해고한다고 말하는 회사는 없다. 해고 통보를 하는 순간, 회사는 이 존재 삭제(또는 생존권 파괴)가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그를 ‘잘릴 만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잘렸지.”

‘그러니까’ 자리에는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다. 이렇게 유약하니까, 이렇게 드세니까. 우유부단하니까, 고집스러우니까. 불성실하니까, 융통성 없이 일만 하니까. 자기만 아니까, 남 일에 참견하니까.

‘곱게’ 나가면 그나마 한두 번 듣고 말지. 못 나가겠다고 버티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잘릴 만한 사람’인지 반복해 알게 된다. 나를 나로 유지해온 것들이 야금야금 금 가기 시작한다.

“(회사가 망해) 문을 닫아도 회사는 미안해하질 않는데,
일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잘못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폐업을 당하고 자책에 시달려본 이의 말이다. 해고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미안해하지 않는데, 해고된 사람만 자신에게 잘못은 없었는지 돌아본다. 나의 쓸모를 의심한다. 이런 불신과 자책을 이겨내고 자신은 ‘그렇게 잘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순간 싸움은 시작된다.


우리의 밥줄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정은(유다인)처럼 ‘못 나간다’ 선언을 하는 순간,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연다.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빈 책상에 앉혀둔다. 현장·파견직 가리지 않고 낯선 부서로 이동시킨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이런 형벌을 일상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는 회사가 유일하다. 이유는 하나다. 밥줄을 쥐고 있기에.

영화 속 하청업체 직원들이 송전탑에 매단 철끈은 위태롭게만 보이지만, 그것은 정은과 그들이 붙잡고 있는 밥줄이나 다를 바 없다. 밥줄 끊길까 봐 저 철끈에 매달린다. 회사를 향해 ‘나를 되찾겠다’ 하는 일은 그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일이다. 줄이 끊겨 나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줄을 유지하기 위해 잡아당기는데, 그로 인해 줄이 끊어질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줄을 잡은 손을 놓는다.

내가 아는 이 중 세 번이나 해고된 사람들이 있다. 줄을 잡아당겼다는 이유만으로(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거듭 해고를 당했다. 이들은 내게 물었다.

“세 번이나 해고시키는 회사가 어디 있어요?”
나는 말했다. “세 번이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요.”

대부분 첫 번째 해고 때 두 손 들고 떠난다. 영화 속 고용노동부 직원의 정제된 말투(다시 말해, 남의 일이라는 태도)를 일상으로 겪어내어야 하는 것이 해고 싸움이다. 그러니 못 버틴다. 그런데도 이 승산 없는 싸움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잘 싸웠지?

싸움은 옆에서 보고 있기가 괴로울 정도이다. 영화 속 정은이 편의점에 들러 팩소주를 살 때마다 나는 안주라도 챙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친자매였으면 그 바닷가 마을로 찾아가 정은을 끌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딴 회사, 너 싫다고 하는 회사, 그만 나오라고. 나올 수 없는 이유를 알면서도 그리 말했을 테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싸우는 이들에게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남의 일이라서가 아니다.

왜 싸우는지 아니까. 싸우는 사람들을 만나 ‘왜 싸우는지’를 묻는 것이 나의 일이다. 돌아오는 답을 기록한다. 싸움의 이유를 진정 몰라 묻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싸우는 이유를 기록해, 그들이 지키려고 한 존재를 나 또한 같이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 말을 지켜주고 싶다. 그래서 그를 ‘그런 사람’으로 내모는 사회의 작동 구조와 기업의 탐욕을 말한다.

동시에 기대를 품고 이들의 싸움을 지켜본다.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 싸운 사람들은 설사 싸움에 져서 해고가 된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싸우는 과정에서 ‘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회사의 기획 폐업에 맞서 1년을 거리에서 싸운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중·장년 여성들의 노동을 귀하게 여겨주지 않았다. 이들이 ‘잘리는 일’ 또한 별것 아니었다. 왜 세상이 자신의 노동을 ‘뜨겁게’ 생각해주지 않는지 이들은 가슴을 쳤다. 결국 취업 알선을 하는 데 애써보겠다는 휴지 조각 같은 약속을 받고 싸움을 끝내야 했다. 절망을 밟고 섰을 것 같은 자리에서 이들은 “그래도 우리 잘 싸웠지?”라고 말했다. 내가 책*을 쓴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써달라고 했다.

싸움 끝에,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타인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나라는 존재’는 관계 속에 있는 한 사라질 수 없다. 이제 ‘나’는 타인이 짓밟을 수 없는,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할 수 없는, 동료에게 “우리 잘 싸웠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화 속 정은은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지금도 영화 밖 무수한 정은들이 어디선가 자기 자신에게 잘 싸웠다고 말을 건네는 중이다. 이것은 누구도 나의 존재를 훼손할 수 없다는 선포다. 그러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가 사라졌다(2020, 파시클) 폐업과 해고에 맞서 싸운 여성들의 기록이다.


그 사는 권리를 주장해야지

다만 영화 속에는 ‘동료 맺음’의 자리가 비어 있다. 이후 정은의 행보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은은 하청직원 누구하고도 동료 맺기를 하지 못한다. 배우 오정세가 맡은 역할인 하청직원 ‘막내’는 이렇게 말한다. “저 (송전탑) 위에 가면 동료밖에 (믿을 것이) 없어요.”

정은은 저 위에 함께 오른 적이 없다. 타인을 믿고 자신의 목숨 또는 밥줄을 맡겨본 적 없다. 누군가와 함께 자신(들)의 밥줄을 지켜본 경험도 없다. 정은이 원청 직원에 의해 밀쳐 넘어졌을 때, 달려와 그를 일으켜주는 하청 직원은 없었다. 아직 이들은 동료가 아닌 것이다.

영화는 섣부르게 관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대신 당신과 나의 동등함을 말한다. 정은은 자신의 끼니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이고,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의 밥그릇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밥줄이 중요하다면 당신의 밥줄도 소중하다. 원청과 하청이라는 이름으로 갈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구분한)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숟가락 빼앗는 일이 정당화될 수도 없다.

예전에 만난 대학 청소 노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을 ‘밑바닥’이라 했다. 청소하는 자신들이 이 대학에서 가장 밑에 있다고. 그러던 이가 만만하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되자 세상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내가 즈그보다 배움은 부족하지만 즈그나 나나 인간의 존엄성은 다 똑같잖아.
그쪽도 월급 받는 삶이고. 우리도 월급 받고. 다 똑같은데.
즈그도 밥 먹고 우리도 밥 먹고 사는데.
리가 밑에 있다고 밥 안 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 그 사는 권리를 주장해야지.

먼저 ‘짤려도’ 마땅한 밥줄은 없다. 존재가 지워져도 괜찮은 사람은 없다.

정은과 막내의 관계는 우리가 모두 하루 세 끼 먹고사는 자들이라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정은은 동료였던 적 없는 이, 그러나 밥줄을 같이 목에 매었던 자신과 동등한 이에게 마지막 선물을 건넨다. 그 선물이 아름답고 빛났기에 기대한다. 정은이 언젠가 동료들을 향해 “우리 잘 싸웠지?”라고 말하는 순간을.
희정(기록노동자)
싸우고 견뎌내고 살아가는 일을 기록한다.
공저로 회사가 사라졌다』 『밀양을 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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