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사랑과 희생은 동의어가 아니다
2021-05-03 10:00:00

사랑과 희생은 동의어가 아니다

: <첫번째 아이> 허정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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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 후 회사로 돌아간 여성은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아이가 아프거나 업무가 밀릴 때마다 그는 하나의 역할을 접어두라는 눈초리를 받는다. 어떤 이는 그의 양 날개를 두고 과욕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멋지다며 격려한다. 그러나 <첫번째 아이> 속 정아의 일상은 욕심이 낳은 결과로 축소할 수도, 안정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 위로할 수도 없다. 남편은 늘 정아보다 한발 늦고, 상사는 정아를 눈치 보게 만든다. 정아를 다 키운 정아의 어머니는 손녀를 돌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단편 <잠들지 못하던 어느밤> <밝은 미래> 등을 만든 허정재 감독은 첫 장편 <첫번째 아이>를 찍으며 이 오래된 굴레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여러 세대의 고민과 시스템의 구멍이 중첩돼있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가 떠오르는 제목이다.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가.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우리 어머니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종종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계셨다. 그 모습을 머리에 담아뒀는데, 어느 순간 그때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그 뒷모습이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그에 대해 질문해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목의 경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영향도 있었는데, ‘첫번째’라는 표현이 주인공 정아의 인생에 방점처럼 찍혀 변화의 순간을 강조하길 바랐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는 생각으로 제목을 붙였다.

사회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정아의 고충이 디테일하게 표현된다. 아이가 수족구병에 걸려 엄마가 회사에 가지 못하거나 집밖에서 기저귀를 갈기 위해 급하게 백화점 화장실을 찾는 상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감독의 경험이 영화에 녹아든 걸까 궁금해지더라.

육아 경험은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항상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공부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 작업을 해온 것 같다. 지인들을 세세하게 인터뷰하거나 자료 조사를 하면서 영화에 접근했다. 그렇게 접한 이야기 중 마음에 다가온 것들을 영화에 활용했다. 수족구병, 화장실 에피소드도 그런 예다.

크게 분류하자면 영화에 세 세대의 여성이 등장한다. 결혼하지 않은 사회초년생 여성,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30대 안팎의 여성, 그리고 장성한 자녀를 둔 중?노년 여성. 이들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긴장감이 영화에 가득하다.

영화에 큰 주제가 있지만, 그 외에도 결혼이나 육아와 관련된 다양한 생각들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정아가 백화점 화장실에서 만난 여성도 정아와 같은 30대 어머니지만 정아가 가진 생각과 다른 맥락으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윗세대 여성인 정아의 어머니는 손주를 봐줄 수 없는 처지에 대해 정아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통해서 그런 말을 하는 인물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해주고 싶기도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특히 주인공 정아가 회사 후배 지연, 보모 화자와 맺는 관계가 후반부까지 팽팽하다. 이들 사이의 갈등이 쉽게 누그러지지 않도록 그린 이유가 있다면.

기본적으로 정아는 회사와 집이라는 두 공간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인물이다. 각 공간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데 둘 다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이때 그림자처럼 정아의 역할을 보충해주는 사람이 회사에서는 지연, 집에서는 화자다. 정아가 아이 때문에 회사를 비울 때는 지연이 일을 대신 해주고, 회사를 가서 집에 없을 때는 화자가 아이를 봐준다. 인터뷰해보니 보모들 중에 본인의 자녀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분들이 있었다. 어딘가 아이러니하다 싶었고, 꼬여있는 것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이를 현실적으로 묘사해야 개인이 아닌 공동의 문제로 놓고 논의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인물 구도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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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장르적 터치로 포착한 신들도 있다. 정아가 혼자 영화관에 다녀오는 시퀀스는 유독 스릴러처럼 다가왔다.

장르적으로 보이기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이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질 수 있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들을 넣고 싶었다. 잔잔한 영화다 보니 관객이 영화에 좀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 서늘한 드라마에 드물게 온화한 순간이 있다. 햇살이 가득한 거실에서 정아가 딸 서윤의 머리를 잘라주는 신이다. 정아가 가진 사랑을 보여주는 한편 관객이 쉬어갈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짧지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신이다. 정아가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아이로 인해 힘들어하는데, 그 양가감정이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나. 그 양가감정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도 정말 사랑하는 장면이다.

정아를 연기한 박하선 배우가 극 전반을 책임진다. 박하선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가 있다면.

정아 역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깊이 있는 분위기를 가진 분이었으면 했고, 정아처럼 육아 경험이 있는 분이었으면 했다. 박하선 배우가 이 둘을 충족한 분이라고 생각해 시나리오를 드렸는데, 열악한 독립영화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좋은 연기를 보여주셨다. 촬영 중 어떤 순간에는 내가 관객이 되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면 이 영화는 박하선 배우가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 같다.

남성 감독으로서 출산 이후의 여성 시점으로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그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정아의 감정선이 여성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정아와 같은 사건을 겪으면 정아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성역할을 떠나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이게 특수한 한 여성만의 일이라고 여기기보다 보편적인 감정을 다룬다고 생각하며 썼다.

첫 장편 연출작 <첫번째 아이>를 전주에서 선보이는 소감은.

오랫동안 해온 작업을 세상에 내보내게 되어 기쁘고, 전주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어 영광이다. 지금껏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해왔는데,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글 남선우·사진 최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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