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전남편 제리를 두려워하는 웨이트리스 아그네스는 우연히 알게 된 남자 피터와 동거를 시작한다. 피터는 걸프전에서 군 복무하던 당시 생체 실험 대상자였던 자신의 몸속에 벌레가 이식되었다는 비밀을 털어놓고, 아그네스 역시 점점 그의 공포에 동화되어간다. 각기 고독하고 쓰라린 과거를 겪어온 두 사람의 망상은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성채를 만들어간다. 여기선 발신인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끝없이 울려대며 신경줄을 긁어대는 전화벨 소리와 에어컨 소음, 귀뚜라미 울음소리마저 섬뜩하다.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의 끝없는 대화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계속 망설이게 하다가, 불현듯 둘의 광기가 폭발하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선 윌리엄 프리드킨의 1973년 작 <엑소시스트>의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폐소 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듯한 이 정교한 영화를 통해, 프리드킨은 캐릭터가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관객에게까지 전염시키며 그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현실을 일깨운다. 9·11 테러 이후 국가 너머 혹은 우리들의 정부, 내 옆에 누워있는 친밀하던 그 사람 모두 위협적인 타인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박증적 정신세계가 장난감 현미경으로 해부되는 듯한 오싹함이 강렬하다. 2006년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