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매거진』 ‘생명’을 생각하다 〈언니 유정〉 정해일 감독
2024-05-04 18:04:00

고등학생의 영아 유기·치사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다. 소재 자체가 충격적이고 무거운데 이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기로 생각한 동기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쓸 무렵 조카가 태어났다. 조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새로운 생명을 맞이한 덕분에 가족 관계는 더욱더 화목해져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성년자의 출산과 영아 유기, 치사에 관한 법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는 한 신문 기사를 접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큰 축복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곳에서의 그 무게감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 계기가 됐다.

극의 중심을 이루는 건 피의자 기정의 언니 유정이다. 전작 단편 〈더더더〉(2022)에서 호흡을 맞춘 박예영 배우가 연기했는데, 그의 어떤 점이 ‘유정의 얼굴’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나.

시나리오를 쓰면서 유정이라는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배우가 박예영 씨였다. 앞선 작업을 통해 그가 감독의 생각 이상으로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하는 배우라고 느꼈고, 겉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선함은 물론 내면에 숨은 단단함과 강인함 등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유정이라는 캐릭터가 표현해내야 하는 복합적인 지점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또 세밀한 감정 표현을 그 누구보다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니 유정〉은 얼핏 수사극의 외형을 띤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의 실제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보다 유정의 심리 변화와 자매 간의 관계에 더 관심을 두는 듯 보인다. 형사 사건을 자매 간의 심리극으로 풀어가려고 한 이유가 있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 영화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을 단순한 소재로 사용하기보다 ‘이런 일들을 겪는 캐릭터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일까?’라는 지점을 더 많이 생각했다. 미스터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진실을 밝혀내 답을 찾는 것보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동생 기정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 유정이라는 인물이 겪는 딜레마를 통해 유정과 기정이 서로를 알아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 나아가 유정이 기정의 친구인 희진과 환자 수진과의 관계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책임을 지는 모습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관객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다.

자매는 이전 삶 전체를 뒤흔들 만큼 큰 사건을 겪지만 기정과 유정 모두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사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들의 감정도 점점 증폭되고, 그 최고점에서 영화도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캐릭터 감정의 온도와 내러티브의 점성이 함께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어떤 서사 전략, 캐릭터 간의 관계 설정을 했는지 궁금하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서로를 위하는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잠시 소원했던 자매 관계에도 그러한 지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유정과 기정이 영화 속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될수록 서로에 대해 깨닫는 지점들 때문에 두 캐릭터의 감정의 진폭이 커질 거라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 해결 같은 서사적 결말과 자매의 감정 봉합이 클라이맥스에서 함께 표현되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자연스럽게 시간의 역순으로 두 인물이 겪는 사건과 이때 그들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의 전반적인 톤을 생각하면 ‘블루’가 떠오른다. 유정이 근무하는 병원 공간의 색감이기도 한데, 이 색조가 가진 특유의 성격 때문인지 영화의 온도 역시 상당히 차갑게 다가왔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미장센에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유정이 근무하는 병원과 기정의 학교에서는 어둡게 내려진 그림자나 차가운 형광등 빛의 느낌을 살리고 소품, 의상 등의 색상과 질감을 이용해 차가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반대로 유정이 기정을 만나는 면회실이나 자매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창밖에서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과 다양한 소품들로 공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두 가지 콘셉트를 대비해 영화의 전체적인 톤 앤 매너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유정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된 공간을 각 장소들의 복도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복도라는 공간의 물리적인 특징이 한 곳과 또 다른 곳을 연결하는 곳이어서다. 복도를 통해 유정과 기정 자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인물들과도 연결되기를 바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카메라(혹은 프레임)가 인물의 관계와 서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캐릭터가 바라보는 대상을 의도적으로 지운다거나, 한 공간에 있는 이들 중 일부만을 조명해 관객이 캐릭터 간의 관계를 부분적으로만 눈치채게 하거나, 사건 현장의 한 부분만을 보여주는 방식 등, 카메라의 시선을 줄곧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너무 감사하게도 영화진흥위원회와 서울, 경기, 성남과 같은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아 영화를 찍을 수 있었지만 촬영 회차와 스케줄 등에서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가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영화의 콘셉트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영화 속 모든 정보와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내려고 하기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시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무빙과 프레임을 만들었고, 어느 포인트에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인지 늘 생각했다.

유정과 기정은 물론 이들의 고모, 희진, 수진까지 〈언니 유정〉의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감독의 이전 단편에도 여성 주인공의 서사가 많은데, 여성이 중심이 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온 까닭이 궁금하다.

내가 떠올리는 아이디어를 시나리오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은 누구일까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쓰는 것 같다. 여자이기에 남자의 삶을 모른다거나 남자이기에 여자의 이야기를 모를 거라는 이분법적 생각 또한 평소에 잘 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가 보기에 부족하거나 부끄럽지 않고, 누군가가 내 영화를 통해 상처받거나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만을 생각하며 시나리오나 촬영 작업을 하는 편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이 여자일 줄 알았는데 남자라서 놀랐다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한다. 응원을 받기도 하지만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언니 유정〉을 아우르고 있는 생명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는 남녀 모두가 함께 겪는 일이고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아버지에게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지만, 이식을 하기 싫어진 아들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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