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매거진』 다시, 출발점에서 〈은빛살구〉 장만민 감독
2024-05-04 18:06:00

영화 초반 뱀파이어 설정이 인상적이다. 이 부분 덕에 가족 드라마는 잠시 ‘호러'적 성격을 띤다. 이 설정은 어떻게 가져오게 되었나.

트리트먼트에서 초고로 넘어갈 때 기운을 다질 겸 순대국에 소주를 마시다가 주인공 김정서가 그린 웹툰 속 뱀파이어가 생생하게 떠올라 폰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 다른 뱀파이어에게 물린 탓인 것처럼, 아파트를 갖고 싶은 욕망도 타인의 욕망에 전염되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착취하는, 또한 기꺼이 자신의 피와 땀을 내어주는 이 영화 속 가족 관계가 정서의 꿈이자 웹툰인 뱀파이어 장면과 맞닿아 있다.

전작인 단편 〈히스테리아〉(2018)에서도 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은빛살구〉에는 사회에서 흔히 ‘정상 가족'이라 일컫는 모습이 없다. 가족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영화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를 담아내고자 한 까닭은 무엇인가.

〈은빛살구〉는 김정서(나애진)가 고향을 산책하면서 자신을 이룬 뿌리를 탐색하는 이야기다. 서른두 살 비정규직 웹디자이너이자 웹툰 작가를 꿈꾸는 김정서라는 한 인간을 돌아볼 때, 그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의 가족이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는 그가 한 인간으로 바로 서는 과정에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테마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인 동시에 돈과 노동, 과거를 공유하는 집, 함께 나눈 색소폰 음악 등으로 맺어진 다양한 인물들을 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자신과 닮았지만 또 자신이 떠난 고향에서 자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물들과의 관계가 흥미로웠고, 하나씩 구체화될수록 애정을 갖게 되었다.

〈히스테리아〉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혜주라는 인물이 중혁과 가족들과 수박을 먹는 장면에서 출발해 한 명씩, 한 장면씩 피와 살이 붙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꼈다. 과거의 가족들과도 나이를 먹고 각자 서로 다른 관계를 맺게 된다.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도 생기고 언젠가 누군가와 가족을 이루는 것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사실 다른 이야기들도 애써서 썼는데 돈을 구해서 영화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대체로 가족 얘기였다. 멜로와 범죄영화를 만들고 싶다.

주인공인 정서를 비롯해 그의 엄마, 배다른 동생, 고향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친구까지 여성 캐릭터 모두 당차고 씩씩하게 그려진다. 감독의 성별이 캐릭터 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지만 여성 캐릭터를 입체감 있게 그리는 데 한계가 있는 것도 분명할 듯한데. 특이하고 사랑스러운 여성 캐릭터들은 어떻게 탄생했나.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 때 픽션 속 인물들에 대해서 현실에서 만나는 타인처럼 나름의 예의를 갖고 관계를 맺으려는 편이다. 그 사람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이름과 그 사람의 역사 속 주된 사건들, 고향, 그에게 중요한 공간, 현재의 결핍, 관계들, SNS, 음악 취향, 흑역사와 연애사, 소중한 추억 등에 대해 하나씩 만들어 나간다. 정서는 ‘고요할 정’에 ‘호미 서’라는 한자가 떠올랐고, 곰치국 식당과 벌교횟집에서 그가 가족과 보냈을 어린 시절과 북평미술학원을 기점으로 친구들과 보낸 우정의 역사 등을 떠올리면서 시작했다. 이복동생 정해는 서울에서 미대를 다니면서 고향을 떠나 자기 삶을 살아가는 김정서가 엄마 몰래 아버지 김영주(안석환)에게 한번씩 용돈을 받으러 내려오면서 정서에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전사에서 출발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돌파해 가는 언니 정서를 보면서 자기 나름의 길(묵호 음악인)을 일찍 개척하는 다부진 모습들을 떠올렸다. 택시기사 해정은 동해시를 돌아다닐 때 중년의 여성 택시 기사를 만나 떠올린 캐릭터다.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인 택시를 마련해 그것을 오랜 업으로 삼고 살아가기를 택한 문해정이라는 인물을 생각했다. 묵호성당을 다니는 것, 더불어 과거에 만화책방을 차렸다가 망한 전력이 있는 전사도 떠올렸었다. 삶에서 여성인 가족들에게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랐다. 여성인 친구들도 내게 일상과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 떠나서 배우들이 각자 그 인물이 되어 매력적으로 생생히 살아주었다.

정서를 연기한 나애진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뱀파이어를 연상했을 때 동떨어지지 않도록 메이크업이나 의상 등에도 신경을 많이 쓴 듯한데. 정서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애진 배우를 만나고 일주일 정도 됐을 때, 새벽에 깨어나 내가 생각한 뱀파이어 김정서의 모습과 미소를 짓는 모습이 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끼며 캐스팅을 결정했다.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 웹툰을 그리는 웹툰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지인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일하며 회를 뜨는 법을 배우는 등 김정서의 여러 면을 하나하나 채워갔다. 또 고향의 옛 친구들, 가족과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인터뷰, 자신에게 익숙했던 어릴 적 옛 장소들을 직접 거닐면서 자신의 모습에서 정서의 면을 찾는 노력도 했다. 에반에센스 등의 고딕 메탈에 대한 취향과 뱀파이어 웹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의상, 분장, 연출팀과 함께 정서의 미스매치된 의상과 검정색 무광 네일, 운동화, 목걸이 등의 디테일을 만들어갔다. 동해시로 갔을 때는 좀 더 색채감이 풍부해지는 공간에서 정서도 정해와 다른 가족들, 친구들을 만나면서 깨어나는 과정을 마주한다. 여기에 맞춰 좀 더 따뜻한 톤과 소재의 코르덴 재킷, 정해와 매치한 캡 모자, 중학생 때 입던 체육복 등을 매치했다. 뱀파이어 의상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이마 베프〉(1996)를 떠올리며 구상했다.

정서와 반목하며 극에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건 그의 아버지인 영주다. 하는 짓마다 밉상인 그는 그러나 미운 구석만큼이나 귀여운 면이 도드라진다. 사랑스러운 말썽쟁이 아버지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안석환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실제 강원도 동해시 묵호는 타지에서 와 어업과 시멘트 공장, 기타 여러 업에 뿌리를 내린 분들이 많다. 전라도 벌교에서 강원도 묵호로, 어릴 적 가족을 떠나 자신의 삶을 새로 시작한 김영주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그곳에서 배를 타는 것부터 시작해 항구에서 일을 하다가 곰치국 식당에 스카우트 된다. 거기서 서울의 옛 아내인 최미영을 만나고, 김정서를 낳고, 다시금 서주희와의 인연으로 정서와 미영을 버린다. 곰치국 식당에서 벌교횟집으로 리모델링을 하고 새 삶으로 넘어간 것까지가 그의 전사다. 수원의 횟집에서 일 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동해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김영주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안석환 배우는 정답을 쉽게 찾기보다 리허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답을 찾아나가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영화 〈어바웃 타임〉(2013)에서 야외 결혼식에 비가 내리는데에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얘기하던 게 생각난다. 드라마 장르지만 유머와 위트가 곳곳에서 숨쉴 수 있도록, 다채롭고 냉정하게 김영주를 완성해 주었다.

정서가 아버지가 있는 동해 묵호항에 오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파트 청약을 위한 보증금을 받기 위해서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주거 문제와 결혼을 통해 집 장만을 이루려는 이들의 욕망을 다룬다. ‘가족'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파트'라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아파트 계약금을 목적으로 동해시로 내려온 김정서가 이 여정에서 자신의 뿌리를 이루는 다양한 관계들가족, 사랑, 친구, 노동, 꿈, 집을 돌아보고 자신을 존중하는 첫 출발점에 서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서의 이 여정을 따라 논골담길의 작은 주택들과 항구의 노동 풍경, 그곳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욕망을 이루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아파트 하나로 모아지는 서울에서의 욕망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정서의 상황, 남편 없이 혼자 살며 노후를 걱정하는 정서의 엄마 등을 통해 오늘날 여성의 노동과 삶의 단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만 영화는 이를 비교적 가벼운 톤으로 담아내고 있다. 감독이 생각하는 이 시대 여성의 삶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30대 친구와 그들의 동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점은 여전히 성희롱과 경력단절,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것이었다. 이혼을 하고 홀로 살아가는 중년 여성에 대해 ‘이혼녀’라는 단어로 낙인을 찍고, 여성혐오 문화와 범죄 또한 여전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 주변에서 이러한 문제들과 마주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은 의연한 태도로 편견에 대처하고 문제를 현실적으로 돌파할 방법을 찾아나갔다. 고통에 짓눌리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여성인 가족과 친구 들의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많이 배웠다. 불완전하더라도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힘들 때 같은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이자 친구, 연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 이야기를 썼다.

강원도 동해시를 배경으로 이야기의 대부분이 펼쳐진다. 로케이션 과정이 궁금하다. 또 이야기의 중심 공간이 되는 묵호의 집과 횟집, 엄마와 함께 사는 서울 집을 각각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궁금하다.

2018년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무궁화호를 타고 강원도 동해시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계절에 한번씩 그곳을 걸으면서 떠오르는 인물과 이야기를 정리했다. 내게 익숙하고,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장소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PD와 제작팀이 내 요구사항을 모두 반영해 장소들을 찾고 기어코 섭외를 해주었다. 묵호의 집은 하평해변 마을을 중심으로 영주가 동해시에서 자리를 잡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지은, 제법 그럴듯한 이층집이라는 콘셉트로 잡았다. 정서의 어릴 적 흔적들과 정해와 영주, 주희의 현재 흔적들이 교차하는 집을 떠올렸다. 벌교횟집은 묵호항 인근의 시장 골목에 위치한 횟집으로 서주희의 취향대로 전남 보성의 녹차밭 사진과 그가 취미로 하는 사진으로 찍은 갖가지 액자들,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정서의 졸업작품 그림이 섞여 있는 것을 상상했다. 2층에는 갖가지의 물건과 옷가지, 일하다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정서가 영주와 미영과 함께했던 기억이 녹아 있는 흔적을 상상했다. 정서가 미영과 사는 집은 대학로 골목 인근의 언덕을 지나 낮은 전세금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집을 떠올렸다. 미영은 이혼 후 집에 투자하기보다 그 자신이 직접 일굴 식당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인물이다. 베란다에는 동해에서 가져온 잡동사니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거실에서 퇴근 후 정서와 미영이 맥주와 늦은 저녁을 함께 나누며 보내는 일상을 떠올렸다. 정서의 방은 그가 미대에 다니면서 작업한 작품들이 나름의 톤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박정민 미술감독이 인물을 중심에 두고 영화 속 공간들에 그곳만의 분위기와 디테일을 살려내고자 분투했다.

첫 장편 연출을 하는 데 설렘과 함께 두려움도 컸을 것 같은데. 작업 과정은 어땠나.

장민승 감독의 다큐멘터리 〈둥글고 둥글게〉(2020)의 광주 파트 조연출과 장애인문화공단에서 주최한 〈이몸저방구석〉이라는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촬영을 맡았던 경험, 더불어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에서 조연출로 참여하며 나눈 경험들이 첫 장편 작업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 대해 재미를 느꼈고, 어깨 너머로 연출자들의 분투와 참여자들이 마음을 열고 본인을 열어보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소심한 나 또한 조금은 그들을 따라서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은빛살구〉의 배우, 스태프 분들은 내 영화라서가 아니라 정말 다들 너무 좋았고 자기 일을 잘해주었다. 프리부터 후반까지 참여한 각 파트 분들의 취향과 색깔을 영화에 다채롭게 담아내고 싶었다. 연출자로서 중심을 잡고 그들과 괜찮은 지향을 찾고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물론 시간 압박과 날씨와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 수정, 갖가지 만만치 않은 아수라장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감독으로서 배우, 스태프에게 많은 격려와 애정을 받았다. 그래서 완성할 수 있었다. 우리 스태프, 배우 분들과 이 영화를 만들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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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을지로를 배경으로 30대 자영업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누아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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