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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6·25 한국전쟁 시기, 전주는 서울로부터 피난을 온 영화인들의 새로운 거점이 됐다.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대형 극장 (70mm 영사기를 구비한)이 시내 중심에 있었고, 예술의 본향답게 많은 영화인들에게 친숙한 문화환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시기 미군의 공보 영화들이 이곳에서 제작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기반 시설과 인적 자원이 그대로 전주에 남아 있었다. 1955년에는 1950년대 한국영화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우는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 전주에서 만들어졌고, 1957년에는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인 <선화공주>가 제작됐다. 나는 그 사실을 1999년에 알게 됐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전주의 지역영화가 존재했음을 알고 있던 영화제 준비위원회에서 나에게 당시의 영화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전주 출신으로 대표적인 한국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고 송길한 선생님과 함께 대부분 유실된 필름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지역 영화사-전주>는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그것이 나와 전주국제영화제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26년이 지났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 프로그래머 제안을 받으며 나는 그 26년을 생각해본다. 작고 큰 부침을 겪으며 대안적인 독립예술영화를 알리는 풍요롭고 맛있는 영화제로 성장해 온 전주국제영화제는 마치 76년 전 전주에서 활동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를 꿈꾸는' 영화인 선배들과 닮아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말은 벌써 몇 년째 계속 되고 있다. 사실 위기가 지속되면 그것은 더 이상 위기가 아니라 '상태'일 것이다. 바로 그 상태의 지금 전주에서, 나는 여전히 영화를 극장에서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의미 있는 경험인지를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불특정의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영화와 극장이 관객에서 선물할 위대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밀폐된 공간. 공간이 주는 두려움에 아버지의 손을 꽉 잡고 겨우 자리에 앉고 얼마 후, 컴컴한 공간에 한 줄기의 기적 같은 빛이 내리쪼이며 나와 아버지와 모든 사람들을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던 영화와 극장의 첫 경험.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하고 난 후엔 제각각 조금씩 다른 생각들을 하며 헤어지는 시간의 꿈결 같은 경험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장래희망은 특정한 직업군이 아니라 가족의 복수를 꿈꾸는 무림인의 뒤를 따라다니거나 드넓은 사막의 베두인족이거나 서부 어느 목장의 말과 소를 키우는 목동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결국 난 내 스스로가 겁이 많고 더운 날씨를 못 견디며 동물과 친화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던 어느 날 저 마술 같은 빛을 만들어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과정에 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시작점이거나 혹은 흔들리거나 길을 잃었을 때 새로운 빛이 되었던 영화들. 그 영화 세 편을 공유하고 싶다.
선택한 첫 영화는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2년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나는 여전히 우물가 멀리 해를 등지고 다가오는 하리트 부족의 족장 알리(오마 샤리프)의 등장 장면을 너무 사랑한다. 자연과 인물과 이야기가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압도하는 장면. 그리고 피터 오툴과 오마 샤리프, 앤서니 퀸, 알렉 기네스 같은 20세기 최고의 배우들 연기의 정점을 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60년이 지난 과거의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오늘날 중동 비극들의 원점의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품은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1966년 영화 <청년의 바다>다. 1997년 일본 니가타에 <낮은 목소리 2> 상영으로 갔을 때 그곳의 초등학교 강당에서 오가와 신스케 전작전을 하고 있었다. 워낙 러닝타임이 긴 다큐멘터리였고 전작전이었기 때문인지 강당엔 요와 이불이 잔뜩 깔려 있었다. 이틀 동안 하루 종일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영화가 강당에서 상영됐고 그곳에서 상영됐던 그의 작품 중 <청년의 바다>와 <산리즈카: 헤타부락 Narita: Heta Village>(1973)이라는 영화가 가장 좋았다. 그중 1966년에 제작된 <청년의 바다>는 감독의 초기 작품인데, 당시 16mm 필름 카메라와 같은 속도로 녹음되는 녹음기를 구할 수 없어서 다른 속도로 녹음되고 재생되는 녹음기로 음성을 담았다. 그래서 계속 화면의 입이나 상황과 사운드가 불일치하고 따로 재생된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 열악함조차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시퀀스들이 있다. 함께 그 감동들을 찾아봤으면 좋겠다. 참고로 나 역시 이 작품을 영어자막으로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영화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나에게 29년 만에 이 영화의 자세한 내용을 한국어를 통해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 역시 이 영화를 선정한 이유다.
세 번째 작품은 다르덴 형제의 2014년 작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세상의 영화인들에게 영화를 만들어야 할 때 가져야 할 태도와 세상을 해석하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다른 장르, 다른 영역, 다른 이야기 구조로 영화를 만든다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세상에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를 고민할 때마다 나는 <로제타>(1999)와 <내일을 위한 시간>, <언노운 걸>(2016)을 내 인식의 내비게이션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 외에 나의 1997년 작 <낮은 목소리 2>, 그리고 2012년 작 <화차>를 상영한다. 오랜만에 관객과 함께 이 작품들을 보면서 나의 지금, 무엇을 만들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싶다. 그렇게 27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함께하고 싶다. (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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