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출품된 작품은 111편으로 지난해보다 10편 남짓 줄었다. 수치만 바라봤을 때 들었던 실망감은 영화들의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 덕분에 금세 사라졌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다양한 주제를 담은 각기 다른 색채의 영화들이 많이 출품돼 특정한 경향을 논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정도다. 굳이 말하자면 퀴어가 자연스러운 대세로 떠올랐고, 영화 또는 예술 제작 과정을 다룬 영화들이 장편뿐 아니라 단편에서도 상당히 많아졌다. 또한 문학 분야의 영향 탓인지, SF적 상상력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올해 출품작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반가움’이다.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를 보여줬던 여러 감독들이 신작을 가져왔다. 20회 영화제에 <욕창>을 들고 왔던 심혜정 감독의 <너를 줍다>, 21회 영화제에서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선보였던 신동민 감독의 <당신으로부터>, 역시 21회에서 <담쟁이>를 보여줬던 한제이 감독의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그리고 10년 전인 14회 영화제에서 <그로기 썸머>를 소개한 윤수익 감독의 <폭설> 등이 그것이다.
전작 <욕창>을 통해 가부장적 가족 관계, 돌봄 노동, 노인 문제 등을 깊이 있게 조명했던 심혜정 감독은 신작 <너를 줍다>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깊은 구석을 파고든다. 쓰레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과 놀랍게 깔끔히 쓰레기를 처리하는 옆집 남자의 만남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이면을 바라본다.
끈적하면서도 징글징글한 가족이라는 세계를 드러냈던 데뷔작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신동민 감독은 <당신으로부터>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를 연장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각인시킨다. 전작에서처럼 감독의 어머니인 김혜정씨가 출연할 뿐 아니라 감독 자신이 그 아들을 연기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번에도 엇물리는 3부작 구성을 선보인다.
정통 퀴어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는 <담쟁이>로 전주에서 화제를 모았던 한제이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우.천.사)>는 청춘 퀴어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다. 1999년 한 고등학교 태권도부를 배경으로 우정과 사랑, 그리고 만성화된 폭력과 성폭력을 겪으며 아파하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박수연, 이유미 등 배우들의 싱그러운 연기가 인상적이다.
청춘의 성장담을 역동적으로 담았던 <그로기 썸머> 이후 윤수익 감독이 내놓은 10년 만의 신작 <폭설>은 어른이 되어 가는 두 소녀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다. 고등학생인 두 친구는 강릉과 서울을 오가면서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사랑하게 된다. 분절된 시간과 공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되는 두 소녀의 감정을 오롯하게 담아낸다. 풋풋한 시절 한소희 배우의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다.
해외 영화제를 통해 먼저 선보인 실험성 짙은 영화들도 눈길을 끈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하버 부문, 지난해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언더커런트 부문 등에서 상영된 전주영 감독의 <미확인>은 1993년 정체를 알 수 없는 UFO가 지구 위 각 도시 상공에 나타났다는 가상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 영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로 29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이는데, 언젠가부터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가장해 등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풍자와 유머, 그리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영화다.
<미확인>과 함께 2023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하버 부문에서 상영된 손구용 감독의 <밤 산책>은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이자 실험영화다. 영화는 어떤 동네의 밤 풍경을 담아내는데, 그 어두운 화면은 손으로 그린 그림의 캔버스가 되기도 하고 조선 시대 문인들의 시를 적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전작인 <오후 풍경>의 밤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고 간밤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영화다.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상영됐다. 주인공인 중년의 여배우가 갑작스러운 뇌졸중에 걸리면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 시사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 잇달아 찾아와 시사회 결과를 들려주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어긋나고 엇갈린다. 이 안에서 객관적 진실과 주관적 진술, 혹은 실재와 허구 사이의 간극과 모순이 드러난다.
다큐멘터리 작품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올해 한국경쟁 부문에서는 앞서 언급한 <밤 산책> 외에도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더 상영된다. 유수연 감독의 <수궁>은 어전광대 정창업의 증손녀이자 첫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광수의 딸인 여성 소리꾼 정의진의 이야기를 담는다. 사라져 가는 동편제의 전통 속에서 「수궁가」를 지키기 위해 전수자를 찾고 있는 그의 힘겨운 노력이 긴장감 있게 묘사된다. 한 여성 예술가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박마리솔 감독의 <어쩌다 활동가>는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주부로 생활하다 어느 날부터 활동가로 살게 된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깝지만 속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엄마의 삶을 카메라로 이해하게 되는 감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주에서 첫 장편을 내놓는 두 감독의 영화도 돋보인다. 곽은미 감독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탈북인 여성의 삶을 연대기순으로 묘사한다. 이 여성은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광 가이드가 되며 일종의 코리안 드림을 꿈꾸기도 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 동생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 영화는 외적 환경 변화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주목한다. 한편, 'KAFA 40주년 특별전' 부문에서는 곽은미 감독의 영화아카데미 졸업영화인 단편 <열정의 끝>도 선보일 예정이다.
박중하 감독의 <잔챙이>는 낚시터를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분위기의 영화다. 한 상업영화 오디션에서 떨어진 무명 배우가 생업인 유튜브 방송을 위해 낚시터를 찾았다가 자신을 떨어뜨린 영화의 감독과 다른 배우를 우연히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서로가 서로를 낚거나 낚이고자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올해의 경우 단편이나 장편 모두 고르게 영화 또는 예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작품이 많이 출품됐는데 <잔챙이> 또한 그중 한 편이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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