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경쟁’ 부문에 출품된 작품 수는 역대 최고 수준인 134편을 기록했기에 그중에 한국경쟁작을 고르는 일 또한 역대급으로 어려웠다. 올해부터 한국경쟁작 선정을 세 프로그래머가 골고루 나눠 진행했던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출품된 영화들의 전반적 수준이 예년에 비해 더 뛰어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치열한 경쟁 끝에 선정된 10편의 영화는 그 어느 해보다 알차고 튼실하다.
여성에 관한 서사는 올해도 강세를 보였다. 감독의 성별이나 장르와 무관하게 한국경쟁작 대다수 영화 중심에 여성이 존재했고 그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동안 이러한 ‘여성 영화’는 여성의 소외나 사회적 피해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올해는 일상적인 삶 속 여성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이는 미투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성 영화가 새로운 진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피아노 연주회를 앞둔 한 여성의 삶을 날카롭게 베어내 보여주는 듯한 〈어텀 노트〉(감독 김솔)는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영화이며,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영아 유기 사건을 통해 자매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언니 유정〉(감독 정해일)이나 임신을 위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집착하는 한 여성의 내면을 드러내는 〈통잠〉(감독 김솔해, 이도진) 또한 비슷한 범주 안에서 조망할 수 있다. 자신의 가족사에서 사라진 고모의 존재를 찾아 나서는 감독의 모습을 담은 〈양양〉(감독 양주연)이나 돈을 쓰지 않는 삶으로부터 시작해 궁극의 자아를 찾아 나선 감독의 여정을 그린 〈담요를 입은 사람〉(감독 박정미)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드러났다. 실험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나선의 연대기〉(감독 김이소) 또한 여성 담론을 중심에 놓은 채 이야기의 줄기를 펼친다.
항상 그랬듯 가족 이야기도 많았다. 치매 걸린 엄마를 둔 아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묘사 없이도 긴장감 넘치게 담은 〈엄마의 왕국〉(감독 이상학) 과 엄마와 이혼한 아빠에게서 엄마의 빚을 받으러 나선 한 여성의 이야기 〈은빛살구〉(감독 장만민)는 대조적인 방식으로 가족의 본질을 폭로하는 영화다. 가족 이야기는 앞서 말한 여성 영화와 중첩되기도 했다. 〈언니 유정〉, 〈통잠〉, 〈양양〉에서도 여성의 문제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화자찬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올해 한국경쟁 부문에서 주목할 바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산업 프로그램인 ‘전주프로젝트’의 놀라운 성과다. 지난해 전주프로젝트의 ‘워크인프로그레스’ 작품인 〈미망〉(감독 김태양), 〈담요를 입은 사람〉, 〈양양〉이 모두 한국경쟁에 진출한 것이다. 특히 서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수년 동안 벌어지는 사랑의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미망〉은 워크인프로그레스 프로그램을 통해 발탁돼 지난해 토론토영화제 디스커버리 부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올해 워크인프로그레스 프로그램에 산업계가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전주와의 귀한 인연을 이어나가는 감독의 영화들도 주목할 만하다.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흩어진 밤〉(2019)으로 한국경쟁 대상을 공동 수상한 김솔 감독은 〈어텀 노트〉를,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 상영작 〈십개월의 미래〉(2021)를 통해 화제를 모았던 남궁선 감독은 〈힘을 낼 시간〉으로 전주에 돌아왔다. 남궁선 감독은 퇴역 아이돌의 뒤늦은 수학여행을 다루는 〈힘을 낼 시간〉을 통해 웃음 속에 숨겨둔 특유의 예리한 칼날을 번득인다.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15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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