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는 역대 최다 편수인 1,332편의 단편영화가 출품됐다. 코로나 19 팬데믹과 극장의 위기라는 또 다른 제약을 거치며, 단편영화 창작자들은 분명 양적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각자의 고유성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균질화된 영화학교와 단편영화 배급사와 영화제라는 타협적인 제도에 순응하는 그럴듯한 완성품이 아니라, 굳어진 제도를 일깨워 흔드는 질적 전환의 시도이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소환되는 시기에, 6명의 심사위원은 손쉽게 분류할 수 있는 표면적 소재와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 영화와 창작을 둘러싼 근본적인 의제를 설정하고 나름의 답변을 마련하고자 하는 영화에 주목했다.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특정한 경향으로 구분하는 건 피상적인 오류를 범하기 쉽지만 몇 가지 단서를 근거 삼아 어렴풋한 인상을 그려볼 순 있다. 첫 번째 인상은 ‘회복’이다. 팬데믹 시기를 지난 뒤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부분의 출품작에서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기를 염원하거나, 유년기의 기억과 장소를 그리워하는 일관된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감염병이 남긴 상흔은 편리한 정서로 공동체를 이끌기 마련이나 우리는 ‘추억의 마법에서 탈출해 변해버린 지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장 르누아르의 조언을 믿는다. 우리를 이루는 세계가 달라졌다는 것을 지각하고 변화된 삶에 예민하게 대응하는 시도에 이끌리며, 심사위원들은 친구나 가족의 죽음, 재난과 사고로 인한 이주, 달라진 연인과의 관계, 내 몸에 생긴 변화를 느끼는 순간을 짚으며 뒤바뀐 삶의 질감을 스크린에 새겨넣은 작품을 진정한 ‘회복’의 영화로 받아들이고 환영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인상은 ‘변형’이다. 여성, 퀴어, 장애인, 어린아이, 동물을 내세우는 작품은 이번에도 출품작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적 소수자들이 처한 환경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층적인 형식과 장치를 매개로 그들이 직면하는 감각을 영화에 정착시키려는 시도들이 돋보였다. 소수자들이 갖는 감각과 시선은 기존의 영화가 견지하던 ‘정상적’ 질서를 변형하는 효과로 나타나며, 이는 영화 매체의 물질성 자체를 변형하는 실험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도 발견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소리를 변형해 들려주며, 피부와 신체를 재구성하고, 마침내 영화가 획득할 수 있는 색다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군의 작품들은, 한 편의 영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층의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맥락 안에서, 지금 여기에 있는 단편영화는 회복기에 놓여 있거나 변형을 거듭하는 중이다. 그 연장선에서 떠올린 세 번째 인상은 ‘믿음’이다. 우리 눈앞에 있는 세계가 낯설게 모습을 뒤바꿀 때, 우리는 우리에게 낯선 세계와 영화를 여전히 믿을 수 있을까? 형식과 서사 양쪽에서 오늘날의 단편영화가 전달하고, 수행하고, 실천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믿음’이라는 영역에 있다고 여겨진다. 심사위원들은 창작자가 단편영화에 내건 각자의 믿음이 적확한 구조나 형식과 맞물리며, 정교하고 구체적인 물질성으로 스크린에 도착해,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긴장감 있게 유지된 작업을 옹호했다.
제도권 안팎에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각종 웹 플랫폼을 위한 영상 제작이 일반화되는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의 창조적 실천을 고민하고, 영화문화의 다른 가능성으로 번질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려 노력했다. 한국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된 25편의 영화에 담긴 고민과 발견을 더 많은 관객이 공유하길 바라며, 소중한 영화를 출품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한국단편경쟁 예심 심사위원
김병규, 김영글, 김현정, 신동민, 이보라, 조현나,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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