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섯 해째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코리안시네마’ 부문 라인업을 완성하는 일이 올해만큼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한국경쟁’ 출품작 중 선택되지 못한 영화들과 세 편 이상 영화를 만든 중견 감독들의 영화가 어느 해보다 쟁쟁하고 치열하게 경합했기 때문이다. 올해 코리안시네마에서 상영하는 17편 말고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영화가 많았지만 작품 수가 제한되어 있는 탓에 매우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에서 가장 강세를 보인 것은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는 이 부문 전체 17편 중 3분의 1 이상인 6편으로 수적으로도 많았으며, 매우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는 작품에서부터 실험성이 짙은 영화까지 질적으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이중 〈바람이 전하는 말〉(감독 양희)은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이창재 감독의 〈길위에서〉(2012), 〈노무현입니다〉(2017), 강상우 감독의 〈김군〉(2018) 같은 다큐멘터리의 작가였던 양희 감독의 첫 연출작인 이 영화는 평생 3,000곡이 넘는 노래를 만들어온 전설적인 작곡가 김희갑의 작품 세계를 담는다. 무엇보다 김희갑이 만든 수많은 노래가 보는 이의 귀를 휘감는다. 〈광천동 김환경〉(감독 박동희, 김환경)은 형편은 안 좋아도 마음이 풍족한 사람들의 터전이던 광주 광천동 일대를 배경으로 미디어 아티스트 김환경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이곳을 기억하려는 모습을 담았다.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를 되새기는 작품들도 있다. 〈목소리들〉(감독 지혜원)은 제주 4.3 사건을 여성의 눈으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로, 아직 생존해 있는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처절하고 비통한 역사의 현장을 재구성한다. 〈조선인 여공의 노래〉(감독 이원식)는 일제 시대 전후 일본 방적 산업에 취업했던 여성들의 삶을 그들의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서술해 진한 아픔을 전한다. 두 다큐멘터리는 여성들의 삶과 그들의 진술에 주목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실험적인 시도가 엿보이는 다큐멘터리도 선보인다. 〈산산조각 난 해〉(감독 오민욱)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민욱 감독의 신작으로, 전작인 〈해협〉(2019)과 〈유령의 해〉(2022)의 연장선에서 이어지는 단상을 서간 형식으로 보여준다. 〈오색의 린〉(감독 이원우)은 2010년 감독이 우연히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말(馬) 몇 마리와 우연히 조우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말에 관한 수많은 질문과 상념을 던지는 영화다.
올해도 전주와 인연이 깊은 감독들의 반가운 신작들이 돌아왔다. 단편 〈신성가족〉(2001)과 장편 〈반두비〉(2009)로 전주국제영화제를 빛냈던 신동일 감독의 새 영화는 따뜻한 로드무비 〈문경〉이다. 직장 일로 시달리던 한 여성이 휴식을 위해 경북 문경을 찾았다가 비구니 스님, 마을 주민 등과 살가운 관계를 맺는 과정을 담았다. 〈성혜의 나라〉(2018)로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2023)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전주를 찾고 있는 정형석 감독도 신작 〈영화로 만들려고〉를 선보인다. 자신의 마음에 충족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감독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영화는 배우 출신인 정형석 감독이 주연을 맡았기에 더욱 스스로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장편 데뷔작 〈내가 사는 세상〉(2018)부터 최근작 〈여섯 개의 밤〉(2021)까지 꾸준히 전주에서 선보여 온 최창환 감독도 새로운 작품 〈수학영재 형주〉를 들고 온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형주가 진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로, 유머와 가슴 찡한 감동을 고루 갖췄다. 지난해 〈유령극〉(2023)으로 전주를 처음 찾아 ‘한국단편경쟁’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던 김현정 감독은 장편 〈서신교환〉을 들고 왔다. 신작으로 고민 중인 한 극영화 감독이 지인인 다큐멘터리 감독을 돕기 위해 강원도 탄광촌을 찾는다는 이야기로, 영화라는 예술 또는 행위의 본질을 묻고 있다. 지난해 전주에 장편영화 〈똥통〉(2023)을 선보였던 장권호 감독은 신작 〈빛과 몸〉을 공개한다. 자신도 모를 힘에 이끌려 춘천에 오게 된 미국 입양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운명과 카르마 같은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장권호 감독의 〈요선〉(2021)에 등장했던 마임이스트 유진규도 출연한다.
생채기투성이고 엉망진창이지만 삶에 위안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가족에 관한 영화들 또한 빠질 수 없다. 〈겨울나기〉(감독 장준영)의 가족 또한 수습이 쉽지 않을 지경처럼 보인다. 30년 이상 수발한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엄마가 치매 기운을 보이자 엄마와 함께 살던 둘째 딸 연은 다른 두 자매와 함께 응어리진 가족사를 헤쳐나간다. 〈자기만의 방〉(감독 오세호)의 주인공인 소녀 우담에게도 가족은 사랑스러운 원수들이다. 9남매 중 넷째인 우담은 독립을 통해 가족으로 탈출한 언니들 덕분에 자기만의 방을 가지려는 찰나 학교에서 사이 안 좋은 친구가 셋째 오빠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사건을 맞는다. 반면 〈우리 둘 사이에〉(감독 성지혜)의 주인공인 척수 장애 여성 은진에게 가족은 지극히 절실한 존재다. 임신한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여성이 출산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성장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여름이 지나가면〉(감독 장병기)은 엄마의 부동산에 대한 욕망의 희생양이 돼 연고가 없는 지역의 학교로 전학한 기준의 이야기다. 어른들의 헛된 욕망 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아이들 속에서 기준은 자기 나름의 처세와 적응 방법을 찾아간다. 전형적인 성장영화는 아니지만 어른들의 세계가 투영되는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의 ‘성장’이 보여진다. 〈보이 인 더 풀〉(감독 류연수)은 독특한
감성의 사랑 이야기다. 집안 사정으로 낯선 곳에 온 소녀 석영이 수영을 잘하는 소년 우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하나, 둘, 셋 러브〉(감독 김오키)는 색소폰 연주자로 유명한 김오키의 첫 장편영화다. 몇 가지 이야기로 엮인 이 영화는 수정, 수자 등 캐릭터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돌아가는 멀티버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류현경, 김의성, 이종필 감독 등이 출연하며 영화 중간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박해일과 백현진이 목소리 연기를 펼친다.
한편 코리안시네마 단편 부문에서는 배우로 유명하지만 꾸준히 영화 연출 또한 해온 감독 유지태의 단편들을 보여주는 ‘유지태 단편 모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작 〈톡투허〉를 비롯해 그의 연출 데뷔작 〈자전거 소년〉(2003)과 〈나도 모르게〉(2007)를 만날 수 있다. 〈모래가 흐르는 강〉(2012), 〈내성천, 물 위에 쓰는 편지〉(2014) 같은 다큐멘터리로 내성천을 지키기 위한 마음을 담았던 지율 스님의 〈내성천 하늘을 날아 오르다〉도 선보인다. 이번에는 내성천을 터전으로 삼는 제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초록밤〉(2021)의 윤서진 감독의 〈정동길〉도 이수경, 강길우 배우가 등장하니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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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10년이 됐지만 유가족뿐 아니라 국민들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여전히 명확한 진상이 규명됐다 하기 어려우며 희생자들의 추모시설 건설 또한 아직 요원하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참사의 교훈이어야 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허공에 떠돌고 있다. 만약 왜 아직까지도 세월호를 들먹이냐고 따지는 이가 있다면 전주국제영화제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전’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희생자들의 억울함, 유가족들의 눈물, 그리고 책임자도 시스템도 없는 이 사회의 실체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지난 10년의 아픈 기억을 반추하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을 찾자고 제안한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되는 6편의 작품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거나 10주기를 맞아 소규모로 개봉한 영화들이다. 슬픔을 함께 나누고 상처를 같이 치유하며 밝은 내일을 이야기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전의 유일한 극영화인 〈목화솜 피는 날〉은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와 영화사 연분홍치마가 공동 제작했다. 주인공은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아버지 병호. 10년 동안 수없이 아프고 힘든 일을 겪었던 그의 마음은 황폐해지고 정신 상태 또한 안 좋아진다. 세월호 안에 마음을 가둬둔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다른 유가족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다루는 영화다. 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2016), 「소방서 옆 경찰서」(2022) 등을 연출한 신경수 감독의 첫 영화이며 박원상, 우미화, 조희봉, 최덕문 등이 출연한다.
〈침몰 10년, 제로썸〉은 〈열일곱살의 버킷리스트〉(2015), 〈엄마 나예요, 아들〉(2018) 등 세월호 관련 다큐를 만들어온 윤솔지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다.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누구나 명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 원인에 대한 해명과 구조 과정의 문제점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경청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편 함께 상영되는 장주은 감독의 단편 다큐멘터리 〈남쪽 항구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는 외롭고 춥고 힘이 들지만 매일같이 팽목항을 지키는 유가족들의 삶을 담았다. 〈세 가지 안부〉는 3개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묶은 옴니버스 프로젝트다. 세월호 다큐 〈당신의 사월〉(2019)을 만들었던 주현숙 감독의 〈그레이존〉은 참사의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 다큐멘터리 작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의 이야기다. 당시 기자들 상당수가 왜 ‘기레기’로 불렸으며 왜 이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는지 당사자의 입으로 들려준다. 한영희 감독의 〈흔적〉은 아이들이 남긴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두 유가족의 이야기다. 자신이 몰랐던 ‘비행’마저 알게 해준 아들의 동영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창현 엄마와 아들이 남긴 물건을 고스란히 보관하며 지내는 호성 엄마를 통해 유가족들의 슬픔을 느끼게 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된 민지와 중학교 친구 둘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이브97〉은 이들 세 친구와 동갑내기인 오지수 감독이 연출했다. 참사 생존자인 애진과 또 다른 친구 혜진, 그리고 참사 이후 세월호 기록단에 뛰어든 감독의 삶, 그리고 민지에 대한 추억이 정겹고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4월 개봉한 〈바람의 세월〉과 3월 개봉한 〈세월: 라이프 고즈 온〉도 이번 특별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바람의 세월〉은 ‘지성 아빠’로 잘 알려진 문종택 감독과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시리즈(2003, 2020) 등을 만든 김환태 감독이 함께 연출한 다큐멘터리다. 꼼꼼히 현장을 기록해 온 문종택 감독의 영상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눈을 통해 바라본 지난 10년의 세월을 이야기한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제에서 선보였던 장민경 감독의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등 ‘사회적 참사’의 유가족들이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을 그리는 다큐멘터리다. 최근의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똑 같은 사건이 거듭 벌어지는 한국 사회의 민낯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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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이어 열리는 ‘전주씨네투어X마중’은 대한민국 대표 여행지인 전주의 위상을 전주국제영화제와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인 ‘전주씨네투어’의 일환이다. 한국영화계, 특히 독립영화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매니지먼트사와 함께 영화 상영, 토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주를 찾은 관객과 소통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올해 전주씨네투어X마중의 주인공은 바로엔터테인먼트다.
우선 바로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의 대표작이 상영된다. 진구 배우의 출연작인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비롯해 공승연 배우가 출연해 여러 상을 받았던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혼자 사는 사람들〉, 이유미 배우가 고등학생 임산부로 출연한 이환 감독의 〈어른들은 몰라요〉, 방효린 배우가 출연한 두 소녀의 모험담 〈지옥만세〉를 선보인다. 또 이홍내 배우가 진구 배우와 함께 출연한 6부작 웹드라마 〈사막의 왕〉이 전편 상영될 예정이며, 신진급인 김상흔 배우의 〈돌림총〉과 박문아 배우의 〈럭키볼〉 등 단편영화도 함께 선보인다.
전주씨네투어X마중에는 바로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배우가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이들은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을 시작으로,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마중클래스’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마중토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또한 바로엔터테인먼트 배우들이 전주시 곳곳의 풍경과 함께 담긴 다양한 화보와 굿즈도 선보일 예정이니 관심 기울일 만하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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