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밤’은 항상 정통 장르영화보다 장르를 매개로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거나 장르를 뒤틀어 새로운 혼종 장르를 보여주는 작품을 선호해왔다. 올해도 경향은 비슷하다. 빙의된 사람들에 관한 호러, 뱀파이어 스토리, 타임 슬립 SF, 판타지 액션처럼 외양으로는 전형적인 장르물로 보이지만, 이들 6편은 실상은 개성 강하고 감독의 작가성이 담겨있는 영화들이다.
아르헨티나 데미안 루그나 감독의 호러영화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시골 마을에 악마에 빙의된 사람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이 마을을 공포에 몰고 가게 될 이 사태는 공권력이나 힘과 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감 없는 두 형제의 손에 맡겨진다. 이 영화에서 빙의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지는데 마치 코로나19 팬데믹을 연상케도 한다. 공동체와 공권력의 방관 속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은 일반 호러영화의 선을 넘어 잔혹하게 묘사되는데 일부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기도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배아 애벌레 나비〉는 키프로스 출신 키로스 파파바실리우 감독이 만든 일종의 타임 슬립 영화다. 한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영화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내일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 이를테면 2005년의 오늘 행복하게 지냈던 커플은 2036년이 된 내일에는 이혼한 상태가 된다. 이 영화는 정묘한 과학적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기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간 흐름을 통해 사랑, 자본주의, 기술 같은 요소를 건드리고 인간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SF영화다.
〈그녀는 코난〉은 〈와일드 보이즈〉(2017)와 〈애프터 블루 (더티 파라다이스)〉(2021) 등 비관습적이며 전복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프랑스 감독 베르트랑 만디코의 신작이다. 1932년 만들어진 이후 극단적인 마초의 전통 속에 존재했던 캐릭터 ‘코난’을 여성으로 내세우는 이 영화는 여성성에 기반한 일종의 신화 창조이자 ‘야만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기도 하다. 연극적인 구성과 거침없는 이미지, 여성 캐릭터와 여성 배우들의 조합 등으로 기존 코난 이야기를 뒤집는 이 영화는 만디코의 또 다른 파격인 셈이다.
외딴 길가에 홀로 남게 된 한 여성이 총각 파티를 열기 위해 모인 남성 5명과 함께 하게 된다. 캐나다 퀘벡권 영화 〈헌팅 데이즈〉는 이러한 설정에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이야기를 비켜 나간다. 여성은 남성들에게 지배당하기보다 그들의 일원이 되는 듯 보이는데, 그녀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듯하던 남성들의 위선은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하면서 폭로되기 시작한다. 인종과 젠더, 계급 등의 문제를 긴장 넘치는 스릴러 장르 안에 풀어놓는 이 영화는 신인 여성 감독 아닉 블랑을 주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번 불면의 밤에는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감독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소화한 두 편의 영화가 소개된다. 첫째는 청춘 영화에 뱀파이어라는 요소를 결합한 프랑스 로맹 드 생 블랑콰 감독의 〈내 생의 마지막 파티〉다. 내일이면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 확신하는 한 소녀가 친구와 함께 기숙학교를 빠져나가 하룻밤을 지새운다는 이야기의 이 영화는 배경인 1960년대 말 분위기의 화면과 사운드트랙,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나 당대의 청춘 영화 등을 연상시키며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섹스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 청춘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부조리는 영화 안에서 뱀파이어 모티프를 매개로 발현된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캐나다 퀘벡권 영화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감독 아리안 루이 세즈)다. ‘동의하는 자살자를 찾는 뱀파이어’라는 원제에서 연상할 수 있듯, 살인을 싫어하는 뱀파이어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 영화는 소녀가 자신에게 기꺼이 자신의 피를 주면서 희생할 의향을 가진 소년을 만나면서 유사한 설정의 영화와의 차별화를 꾀한다. 블랙 코미디이면서도 동화적 요소가 들어있고 성장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영상의 아름다움 또한 깊은 인상을 준다.
프로그래머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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