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 한제이 감독 - 모두 함께 벽을 넘을 수 있기를
2020-06-01 14:01:00

교통사고로 인해 은수는 다리를 다치고 조카 수민은 엄마를 잃는다. 힘든 시간을 겪은 은수와 그의 연인 예원, 수민은 서로를 보듬어주는 단단한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 세 사람은 가족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담쟁이>는 은수, 예원을 통해 관객이 동성 커플에 대한 제도와 인식의 한계를 목도하고, 변화의 필요성에 관해 자연스레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뿔뿔이 흩어진 채로 다시 함께할 미래를 기원하는 세 사람을 보노라면 이들이 가족이란 울타리 내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담쟁이>를 연출한 한제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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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영화 <담쟁이>를 기획하게 되었나.

시나리오를 쓸 때 영상을 먼저 떠올리고 거기서 시작을 하는 편인데, 처음 떠오른 것이 한 아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병원에서 보호자 인정을 해주지 않아 면회를 하지 못했다는 동성 부부의 이야기를 엮어 <담쟁이>를 제작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보통의 가족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예원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반면 은수는 소극적인 편이다.

은수는 선생님이기도 하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쓴다는 설정의 인물이다. 때문에 ‘우리 사랑을 지키려면 남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끼리 잘 지내면 충분하다’라는 인식이 강하다. 반면 예원은 부모님이 동성 애인의 존재를 안 뒤로 지원도 연락도 끊은 상태로 설정했다.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예원은 남들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은수에 비해 독립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지녔고. 이처럼 두 사람은 처한 상황도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사랑을 지키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그런 점이 가족에 대한 두 사람의 관점 차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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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원이 은수와 수민 사이를 잘 이어주는 인물이라 느껴졌다.

맞다. 교통사고 후 은수도 수민이도 마음의 상처가 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예원이가 서로를 잘 이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예원이 잘 받아주고 놀아주니 수민이도 예원이를 편하게 대하고 셋의 관계도 좀 더 매끄러워진다. 다만 세 사람 모두 각자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도 연출된다. 예를 들어 수민이는 예원이 앞에선 한없이 아이 같이 행동하지만 은수 앞에서는 아이답지 않게 굴어서, 예원이와 수민이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은수가 가출한 수민이를 호되게 혼내는 장면에서는 예원이 둘의 눈치를 보며 함부로 끼어들지 못한다. 은수와 수민의 혈연관계가 도드라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더 감정이입해서 바라본 인물이 있나.

처음엔 수민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이 수민이기도 했고. 그래서 수민이의 시선을 따라가는 설정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주제를 드러내기에는 현재의 구조가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해 바꾸게 됐다. 진행 과정에서는 예원에게 감정이입이 됐는데 영화를 완성할 즈음에는 은수의 상황에 몰입하게 되더라. ‘저 때 은수의 심정이 어땠을까,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은수의 사랑이 ‘찐사랑’이 아닐까 한다.(웃음)

-자기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은수가 차갑다고 느껴지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런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은수는 워낙 현실적인 인물이고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잘 말해주지 않는다. 또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자신을 붙잡는 예원의 곁도 결국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떠난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수는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셋이서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인물이다. 계속 거부하던 재활치료도 입원까지 해가며 열심히 받는데, 어떻게든 치료를 열심히 받고 빨리 회복한 후에 수민이를 데리러 가기 위함이다. 본래는 은수가 수민이에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장면도 촬영했다. 그 장면에서 은수는 수민이에게 “이모가 얼른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촬영하고 보니 수민이에게 저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더라. 보육원 원장선생님에게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수민이의 그 눈빛을 보고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은수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오히려 굳게 마음을 먹고 얼른 데리러 오겠다고 결심할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은수 성격에 어울리는 결정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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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보육원에서 은수를 기다리던 수민이가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일부러 보육원에서의 수민이 신을 영화의 앞뒤에 배치했다. 엔딩 신에서 은수를 기다리던 수민이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그게 <담쟁이>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민이의 시선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가닿지 않나. 그 시선이 관객들에게 복잡한 인상을 남겼으면 했다. 누군가는 수민이의 시선에서 희망을, 혹은 쓸쓸함을 느낄 수도 있고 죄책감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수 있겠다. 누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고. 그밖에도 관객들이 ‘셋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 과연 이들의 잘못일까’하고 생각할 수 있길 바랐다. 아이의 눈으로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굉장히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도에서 연출된 신이다. 이 신을 통해 관객들이 ‘이들의 사랑이 뭐가 그렇게 다른가, 이제는 좀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하고 응원해줬으면 한다.

-구조적인 문제 역시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렇다. 응급실에 찾아온 예원은 가족 관계가 아니라는 명목 하에 은수를 면회할 수 없다. 동성애 반대 피켓을 든 시위자를 포함해 성소수자들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계속 등장한다. 전부 같은 의도로 연출된 신이다.

-세 사람의 미래에 관해 생각해본 것이 있다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셋이 같이 살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장 크다. 다리가 다 나은 은수가 보육원으로 수민이를 데리러 가고, 또 예원이도 찾아가면 좋겠다. 예원이도 평생은 아니더라도 그 집에서 1,2년 정도는 은수를 기다릴 것 같고. 혹여나 그런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셋이 함께 생활했던 기억이 앞으로 이들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제목 <담쟁이>에 담긴 의미는?

하나의 담쟁이 잎이 수천 개의 담쟁이 잎을 이끌고 벽을 넘는다는 뜻이다. 은수와 예원, 수민이 담쟁이 잎들과 같이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또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서로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 벽처럼 선 사회가 이들 앞을 가로막을 지라도, 언젠가 다함께 그 벽을 넘을 수 있길 바란다.

글 조현나·사진 백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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