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그려보고 싶었다
2021-04-30 11:00:00

미묘한 감정의 차이를 그려보고 싶었다

<성적표의 김민영> 이재은, 임지선 감독

19살과 20살. 고작 1년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함께한 추억의 무게가 가벼이 여겨질 만큼 길고 깊은 시간이기도 하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관계의 변화를 겪는 세 친구의 이야기를 그린다. 극적인 갈등 대신 무심한 말, 디저트 하나에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 미묘한 감정들을 세밀하게 담았다. 그 시절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정희(김주아)와 민영(윤서영)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적표의 김민영>을 공동 연출한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2017년 한겨레 영화워크숍에서 수업을 들으며 함께 감독으로서의 꿈을 키워왔다. “표현은 거칠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품은 소노시온 감독을 좋아하고(이재은)” “이창동 감독 영화의 예측 불가성을 좋아하는(임지선)” 두 감독의 취향이 <성적표의 김민영>에도 잘 녹아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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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표의 김민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재은 극 중 민영과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들뜨고 설렌 마음이 무색할 만큼 서운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이후로도 가끔씩 그 날이 생각나는데, 어쩌면 그 서운함의 크기가 곧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통해 그 서운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두 감독의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임지선 시나리오의 경우, 재은이 쓴 초고를 바탕으로 함께 발전시켰다. 주요 캐릭터가 정희와 민영이다 보니 각자 한 명씩 맡아서 대사를 직접 읽어보곤 했다. 연출과 후반 작업은 뚜렷한 역할 분담 없이 컴퓨터를 옆에 두고 같이 작업해나갔다.

정희와 민영 캐릭터는 각각 누가 맡았나. (웃음)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두 감독님의 성격이 캐릭터에 일부 녹아들었을 것 같다.

임지선 재은이 정희를, 내가 민영을 맡았다. (웃음)

이재은 사실 우리 둘에게 정희와 민영 같은 면이 조금씩 있다고 본다. 그게 합쳐져서 두 인물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삼행시를 택한 이유는.

임지선 정희 입장에서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는데 삼행시 형식이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재은 보통 삼행시는 예능에서 유희적으로 사용될 때가 많은데 이걸 문학적으로 접근해보려 했다. 정희, 민영, 수산나 세 친구만이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놀이이자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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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00프로 흑역사 생성이다"라며 세 친구가 처음으로 화면에 등장하고, 곧바로 ‘삼행시 클럽’을 해체한다. ‘혹시 감독들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도입부였다.

임지선 나도 그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과 잘 맞닿아 있는 것 같다. 해체식으로 영화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정희와 민영을 떼어놓고 가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은 엄연히 말하면 수능 때문이다. (웃음) 고3들이라 공부를 해야 하니까. 두 사람이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멀어지는데 그 상황의 전조 현상으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단순한 해체식 뿐만 아니라 실제 두 인물의 물리적 거리도 멀어진다. 청주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정희와 민영은 각각 청주와 대구에 거주하게 된다.

임지선 우선 처음에 청주를 택한 이유는 주인공인 정희와 민영이 서울이나 광역시가 아닌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면 해서였다. 청주는 대도시도 시골도 아닌, 그 중간의 느낌이라 좋았다. 민영의 학교를 대구로 설정한 건 하룻밤 자고 와야 할 정도의 거리를 생각했을 때 대구 정도가 좋겠더라. 또 민영이라면 고향을 멀리 벗어나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입시나 대학 동기들과의 관계, 성적 등 자칫 어둡게 그려질 수 있는 주제를 밝게 풀어간다.

이재은 어두워야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어떤 큰 주제를 다루기보단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상황을 풀어가려고 노력했다.

임지선 애초에 <성적표의 김민영>을 같이 연출하기로 한 것도 둘의 상황이 너무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극적 사연 대신 현실적인 사건들을 다루려고 했다. 영화의 톤 앤 매너도 너무 세련되지 않게, 오히려 촌스럽게 가져가보면 어떨까 했다. 정제되지 않는 느낌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미술과 촬영, 연기톤까지 너무 정제된 느낌을 가져가지 않으려 했다. 테니스장이 그런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장소라 생각한다.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도 있을까.

이재은 일본 영화들을 많이 참고했고 그 중에서도 <요나스케 이야기>를 많이 봤다. 요나스케란 시골 청년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생긴 일들을 그린 영화인데, 해당 인물의 매력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처럼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영화를 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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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캐릭터는 어떻게 구성하게 됐나. 유학, 편입 준비, 대학 진학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세 사람 모두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임지선 고등학생 땐 일상을 함께 하고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니 모든 게 잘 맞아 보인다. 하지만 졸업 후엔 각자 상황이 달라지면서 관계에 분명한 차이가 생긴다. 성향이 다른 세 인물들이 이 과정을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는지에 주목해보고 싶었다.

이재은 정희와 민영의 갈등이 주축이지만, 해외에 있는 수산나 역시 정희에게 서운함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미묘한 섭섭함을 느끼는 관계를 그려보고 싶었다.

하루 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변했음을 드러내야 해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재은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일들은 많은 수정을 거쳤다. 이때도 둘이 한 사람씩 맡아서 실제로 대화하고 싸워도 봤다. 어떤 행동과 말을 했을 때 감정이 상하는지 다양한 상황을 대입해봤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미묘함이었다. 그걸 계속 가져가고 싶었다.

임지선 분위기가 아슬아슬하게 흘러가는 전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실제로 사건들의 순서도 많이 바꿨다. 갈등이 크게 일진 않지만,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정희의 편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재은 그 편지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처음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친구간의 관계, 특히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친구를 더 좋아한다는 게 어느 순간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더라. 그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정희를 통해 상처를 준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는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 굉장히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도 정희와 민영이의 관계와 감정을 각자의 상황에 맞게 바라보고 느끼실 수 있길 바란다.

글 조현나·사진 최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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