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유정> 정해일 감독,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늘 바쁘고 지쳐있는 대학병원 간호사 유정(박예영)은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고3 동생 기정(이하은)의 소식을 전화 너머 경찰에게 듣는다. 기정이 교내에서 벌어진 영아 유기 사건의 당사자라고 자수해서 구속됐다는 것. 엄마가 기정을 낳다가 돌아가셨기에 일찍부터 자기를 엄마 대신이라고 여겼던 유정은 동생을 구하고자 애쓰지만 쉽지 않다. 친한 친구도 모르고 똑똑하고 알아서 잘하는 애라고밖에 동생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정에 대해 무지했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다. <언니 유정>은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리하게 묻는다. 서툴지만 분명하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알아가려는 작업에 돌입한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며 그의 분투하는 시간을 먹먹하게 담아낸다. 정해일 감독에게 첫 장편작 <언니 유정>은 유정에게 기정이 그렇듯 애틋한 존재다. 영화를 놓아줄 때가 되어서야 그는 5년가량 한 작품을 붙들고 있는 동안 많은 용기를 얻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화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뉴스에서 종종 접하던 영아 유기 사건이 소재이다 보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아이디어가 처음 떠올렸던 건 조카가 태어난 2018년도였다. 집안에 아기가 있으니까 가족 관계도 화목해지고 나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뜩 이런 일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더라.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몇몇 영아 유기 사건을 접했고 새 생명의 탄생을 개인적인 기쁨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누나가 조카를 낳을 때 무척 고생했는데 그때 처음 누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공포를 느꼈던 경험도 되살아났다. 이런 상념들을 몇 개월간 정리하면서 임신과 출산, 탄생,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 두 자매 캐릭터가 만들어진 걸 시작으로 8개월간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언니 유정과 기정의 관계, 간호사 유정과 임신한 환자(한해인)의 관계, 사건의 실마리를 가진 기정의 친구 희진(김이경)과 유정의 관계까지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에도 균형감을 이룬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까다롭긴 했는데 뼈대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나마 덜 헤맬 수 있었다. 사람이 큰일을 겪었을 때 처음에는 부정하고, 다음엔 슬퍼하고, 마지막엔 모든 걸 다 이해하게 된다는 세 가지 포인트가 그 뼈대였다. 유정이가 언제쯤 부정, 슬픔, 이해 단계를 거칠지를 먼저 잡아 놓은 다음에 중간중간 유정과 환자가 서로 교류하는 에피소드나 그날에 관한 기정과 희진의 회상 장면을 끼워 넣은 방식으로 구성해 나갔다.
-유정이 기정의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서사와 내면의 드라마를 동시에 살려야 해서 플롯을 어떻게 짜야 할지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편집할 때가 진짜 힘들었다. 장면을 어떻게 배치해도 말이 되긴 하는데 신과 신이 붙였을 때 서로 주고받는 영향이 미묘하게 다 달라 어떤 버전이 내가 원하는 구조와 가장 가까운지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중간에 거리두기 차원에서 아예 건들지 않았던 3달까지 포함해 9개월간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러닝타임이 123분에서 102분으로 줄었다. 잔가지를 과감하게 다 쳐내니 처음 생각했던 언니와 동생이 집중한 이야기가 나왔고 희한하게도 캐릭터들이 더 입체적이고 풍부해져 장편 작업은 단편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유정이 잠들어버린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통제된 병원에서 고강도로 일하며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유정의 잠든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으로 도피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유정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유정이 잠자는 장면들은 영화의 템포를 끊는다는 피드백도 받았으나 처음부터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어떤 상황이든 그걸 스스로 삼키고 되새기는 시간이 필요한 유형의 인물인데 중간중간 잠드는 순간들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전철과 버스에서 졸고 동생 침대에서 누워 있는 장면을 찍을 때 박예영 배우에게 이 순간 유정은 단순히 잠든 게 아니라 앞서 벌어진 일들을 소화하는 중이라고 말씀드렸고 배우가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준 덕분에 장면의 결이 풍성해질 수 있었다.
-영화감독의 꿈은 어릴 적부터 꾸었나.
처음에는 영화 타이틀 시퀀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007> 처음 시작할 때 제임스 본드가 걸어들어와 총 쏘는 장면이 내 눈엔 너무 멋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타이틀 시퀀스만 전문으로 하는 직업은 없다길래 자연스럽게 접었다. 영화에 관한 관심이 생긴 뒤로 영화를 많이 봤다. 고등학생 때 고전영화 마니아이시던 아버지께서 비디오방에 만원을 넣어주시면 그걸로 10편씩 빌려보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고 감독을 염두에 두고 영화과에 진학했다. 입학한 20살 때부터 단편을 만들어 온 지금까지 영화를 18년간 했다. <언니 유정>을 찍고 나서야 나를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영화 못 하겠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올 때면 어느 영화제가 불러주고 지원하겠다는 곳이 나타나 여기까지 왔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언니 유정>을 한국경쟁으로 선정해줘 너무나 감사하다. 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1년 치 용기를 여기서 얻었다.
-현재 집필 중인 시나리오가 있나.
아버지가 미우나 혈육으로서 신장 이식을 해주기로 한 아들이 돌연 그 결심을 철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올해 1월 말에 초고를 끝내고 지금은 거리두기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화제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나면 돌아가서 이 작품에 다시 정을 붙여 볼 생각이다.
[글 이유채 / 사진 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