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2 인터뷰: <은빛살구> 장만민 감독
2024-05-04 12:45:00

<은빛살구> 감독 장만민, “뱀파이어의 형상에서 낯선 가족을 발견하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정서(나애진)는 차용증을 들고 아버지 영주(안석환)를 찾아 묵호항으로 향한다. 떼인 돈을 받으러 온 고향에서 정서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 든다. 돈독 오른 아버지에 지쳐 하루 빨리 이 곳을 떠나고 싶지만, 자신을 닮은 이복동생 정해(김진영)가 내내 마음에 걸린다. 정서는 돈으로 얽힌 낯선 가족의 모습에서 자신이 작업한 웹툰 속 뱀파이어의 모습을 떠올린다. 바닷바람이 차게 불던 묵호항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렸다는 장만민 감독과 <은빛살구> 속 복잡하게 얽힌 가족이란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장편 <은빛 살구> 어디서 시작하게 되었는가.

뿌리를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은 맘에 고향 순천에서 가장 떨어진 도시를 찾아 동해시로 홀로 향했다. 무뚝뚝해도 정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고요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순천과 동해시가 참 닮아 있었다. 외지에서도 고향을 발견한 셈이다. 그렇게 4월의 묵호항에서 주인공 김정서를 처음 떠올렸고, 색소폰 앨범을 들으며 이야기들의 파편을 엮어갔다. 이야기의 뼈대는 7년 전에 작성했던 단편 시나리오다. 어머니가 건넨 차용증으로 아들이 돈을 받으러 간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썼을 땐 이야기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느꼈는데, 김정서라는 인물을 떠올리곤 이야기를 풀어가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묵호항에서 떠올린 주인공 김정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공간이나 세계가 먼저 존재해야 인물이 탄생한다. 가장 먼저 묵호항의 한 횟집에 마음이 갔다. 시나리오 쓰기 전 1년간 횟집에서 일을 했었다. 동해시에 오자 그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가족을 따라 일을 도왔지만, 횟집에서 벗어나 서울로 향하고 싶었던 사람. 예술을 수단으로 서울에 올라와 현실과 타협하는 사람. 그런 궤적을 가진 인물을 떠올리게 됐다.

-정서 얼굴엔 피로함과 측은함, 불쾌감과 동질감이 공존한다. 복합적인 감정들 나애진 배우를 통해 구현된. 캐스팅하게 계기가 궁금하다.

나애진 배우가 출연했던 단편 <오 즐거운 나의 집>,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을 재밌게 봤었다. 대사 사이에 여백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채워 넣을 줄 아는 배우다. 확신으로 인물에 다가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처음 나애진 배우를 만났을 땐 가벼운 이야기가 오간 게 전부였다. 일주일 정도 지나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던 어느 새벽, 문득 뱀파이어와 닮은 정서라는 캐릭터 위에 나애진 배우가 환하게 웃는 장면이 겹쳐 보였다. 그때 정서라는 인물은 무조건 나애진 배우여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정서는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웹툰을 그린다. 부녀는 환상 속에서 뱀파이어의 형상을 하고 등장한다. 가족과 뱀파이어라는 이질적인 소재의 공존에 관심이 간다.

정서가 어떤 소재로 웹툰 작업을 할지 고민했었다. 당시 옥타비아 버틀러의 <쇼리>라는 소설을 읽으며 흡혈귀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물론 원래부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트윅스트>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이마 베프>같은 작품을 좋아하기도 했다. 소설 속 뱀파이어 공동체는 흡혈을 목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피를 빨리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독특한 면모도 있다. 피를 빨고 피를 내주는 기묘한 공동체의 형상이 삶을 꾸려가는 가족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은빛살구>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은행(銀杏) 자본과 연결된 은행(銀行)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서는 아파트 청약금 때문에 고향으로 향했고, 영주는 호시탐탐 건물을 올릴 궁리 한다. <은빛살구> 가족에 대한 영화이자 돈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주택 시장에 대해 잘 몰랐다. 아파트 청약은 공사가 마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더라. 집이 완성될 때까지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데 집중한다. 혹자에게 이 시간은 오랜 기간 함께할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성숙의 시기다.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떤 지점에 매수하여 되파는 자산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보금자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투기의 대상인 셈이다. 처음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두 욕구는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안석환 배우가 연기한 김영주라는 인물은 독특하다. 스산함과 능청스러움이라는 사이를 오가 전에 없던 아버지 상을 그려낸.

묵호항에 머무는 중년 남성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시멘트 공장 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영주는 보성에서 묵호항으로 올라왔다. 갖은 일을 하면서 전처 미영을 만나 정서를 낳았다. 하지만 영주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끝없이 부풀어 오른다. 고향을 떠나고 이전의 가족을 포기하며 남긴 영주의 공허함은 외도를 통해 얻은 가족과 식당 그리고 건물로도 채울 수 없다. 안석환 선배와 대화를 나누면서 영주라는 캐릭터를 더 다듬었다. 사실 나는 영주에게 감상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선배님의 조언으로 그에게 부여된 행동의 층위를 덜게 됐다. “착하게 살면 맛이 없다”라는 영주의 대사처럼 그는 욕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타인의 상처를 개의치 않는다.

-특히 영주가 조영남의 <제비> 부르는 장면은 짧지만 영주라는 인물과 크게 공명한다.

이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유달리 안석환 선배님이 노래를 부르고 정서가 윗방에서 방어를 먹는 장면이 생각난다. (웃음) 원곡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멕시코 민요다. 뿌리를 잃어버린 존재가 부를 만한 노래를 찾다가 선배님이 <제비>라는 노래를 추천해 주셨다.

- 아버지의 외도로 탄생한 이복자매는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영주의 외도는 정서가 어느 정도 장성했을 때 발생한다. 도덕적인 판단을 떠나 정말 안 맞는 두 부부가 오랜 시간을 다투다 외도를 이별로 받아들이고 갈라선 셈이다. 정서가 정해를 향해 느낀 동질감은 같은 일상을 보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횟집에서 일했을 때, 매일 아주머니와 아저씨들과 함께하며 가족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저 사람이 드는 짐의 무게를 내가 알고, 상대방이 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는 것.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는 노동과 일상에는 유대감이 있다. 정서는 벌교횟집에 돌아와 자기가 살았던 방에서 묵고, 자기가 일했던 곳에서 똑같이 일하고, 자기가 겪은 부당함과 답답함을 정해가 겪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을 것이다.

-정해는 토라질 때면 가짜 언니라는 비난을 쏟는다. 가짜와 진짜라는 말에서 있듯 <은빛살구> 가족의 경계를 묻는 영화기도 하다.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다. 과연 가족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획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마음을 쓰고, 서로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와 상대방이 함께 살아감에 의미를 두는 관계는 가족일지 모른다.

[글 최현수 / 사진 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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