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 3년 차. 세상은 이미 부글대며 끓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끝장내려 한 대통령의 한 방은 그 자신을 쏘고 광장을 열었다. 이것은 그중 동짓날 밤 우연한 광장, 남태령에 대한 기록이자 그 하룻밤의 광장이 바꾼 것들에 대한 증언이고 남태령을 일상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의 분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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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치광이의 거사가 무산된 지 만 1년이 지나면서 이를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국회에서 벌어진 일에 집중하는 경우부터 이 사건을 우리의 지난 시련들과 연결시키는 영화까지 12·3 내란은 다양한 시선에서 다뤄지고 있다.
<어른 김장하>(2023)의 김현지 감독이 연출한 <남태령>은 이 같은 '내란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분류될 수 있지만, 12월 3일이 아니라 이로부터 2주 이상 지난 12월 21일 오후부터 그다음 날 사이 벌어진 일에 초점을 맞춘다. 전봉준투쟁단의 '남태령 대첩'이라고 기록되는 이 사건은 누군가에게는 이제 희미하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 겨울에는 너무도 많은 사건이 발생했기에 개인적으로도 결국 전봉준투쟁단이 결국 용산까지 진출했고, 이 쾌거가 많은 시민들이 동참한 덕분이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다.
<남태령>은 이 희미한 기억을 똑똑하게 일깨워 주는 영화다. 그렇다고 <남태령>은 이 투쟁의 정치적 영향 따위를 분석하는 보고서가 아니다. 대신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후일담과 소셜 미디어에 담긴 기록, 연단에서 내뱉은 생생한 발언 등을 오밀조밀 엮어낸 일종의 태피스트리다. 또한 이 태피스트리에 새겨진 그림과 무늬는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알려주는 예언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되감아 당시로 돌아가 보자. 2024년 12월 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 전봉준투쟁단은 '윤석열 체포구속', '사회대개혁', '개방농정 철폐' 등을 요구하며 트랙터 40여 대와 화물차 60여 대를 몰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경찰은 남태령에 경찰 버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시위대가 서울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오후 일찍 시작된 대치 상태는 해가 지도록 계속되었고, 이 소식은 광화문 등지에서 윤석열 퇴진 시위에 참가했던 이들에게 전해진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남태령 전선에 동참했고, 이 소식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더 많은 이가 몰려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남태령에 모여든 시위대의 대다수가 2030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윤석열 탄핵 시위가 아이돌 노래에 맞춰 응원봉을 흔드는 이들의 이미지로 남아 있지만, 탄핵 시위 때보다도 여성의 비중이 높았다. 이것은 2016년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사건, N번방 사건, 딥페이크를 통한 성폭력 등으로 계속 분노를 쌓아 왔고, 새롭게 열린 광장 속에서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 의식을 키워 나간 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서로를 독려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였다.
농민운동은 WTO, FTA 등에 반대하는 투쟁 때마다 항상 패배했고, 2016년 전봉준투쟁단의 첫 상경 투쟁도 양재IC를 돌파하지 못한 채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이들 재기발랄하고 활기차며 꺾이지 않는 세대와 힘을 합친 끝에 마침내 트랙터를 끌고 남태령을 넘어 사당 로터리를 지나 용산까지 행진할 수 있었다. 물론 그날 남태령에서 벌어진 연대는 보다 폭넓은 차원이긴 했다. 인터넷 방송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남태령의 일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수많은 시민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이들에게 핫팩, 푸드트럭, 음료, 햄버거, 피자를 배달시키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선보였고 추위에 지친 이들이 쉴 수 있도록 '난방버스'까지 섭외해 출동시켰다.
<남태령>은 남태령 대첩에 참여한 젊은 여성 집단이 이후에도 노동과 인권을 빼앗긴 이들의 싸움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움직임도 보여준다. 특히 넉넉지 않은 환경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누구와도 함께하는 영남 지역 '말벌동지'들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성소수자들이 남태령 투쟁의 중심에 결합했고 이후 '포스트 남태령' 국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라는 대목도 반갑게 다가온다. 아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류 사회의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 대상인 성소수자들에게 광장은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각자 누려야 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곳이 됐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처럼 차별과 혐오의 고통을 겪는 이들과의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결과는 지난해 퀴어 퍼레이드에서 만난 전국농민회총연맹의 부스와 전봉준투쟁단의 깃발, 그리고 고공농성 중인 계약직 노동자가 행렬에 뿌리는 화려한 꽃가루로 나타났다.
새롭게 열린 광장에서 세계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2030 여성의 생생한 모습과 이들이 여러 사회운동과 연대하는 광경을 담은 <남태령>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롭게 운동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보는 이를 분노하고 흐뭇하게 하며 감동받고 깔깔거리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한 젊은이가 어르신에게 자신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자신의 성을 특별히 규정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라며 그 개념을 설명하자 이 어르신이 시원하게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모르거나 당장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자세라는 얘기다. 어쩌면 이 말은 2030 여성들이 거침없이 다른 이들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태도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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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KIM Hyun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