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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약진이었다. 한국경쟁 부문이건 비경쟁 부문이건 출품작 중 다큐멘터리는 작품 수도 많았고 질적 수준도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2·3 내란사태가 촉발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번 한국경쟁 부문에 선정된 다큐멘터리 4편이 모두 '거대 서사'와 무관한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산업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꾸준히 약진해 온 결과로 보인다.
개인사를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공순이>와 <회생>은 각기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공순이>는 감독의 어머니인 김공순 씨의 노동 현장을 중심으로 그의 삶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주인공이 워낙 낙천적이고 활기차다 보니 영화에서 활력이 느껴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반면 감독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삼은 <회생>은 다소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회생'을 돕는 감독 자신이 아예 중심인물 중 하나가 되는데, 따라서 영화는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영화를 찍는 과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두 영화 모두 물리적 거리로는 감독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존재인 부모를 대상으로 삼았지만, 적당한 거리감을 두려는 노력(물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을 통해 질적 성취를 이뤄냈다.
<시민오랑>은 세계 최초로 법정에서 '비인간 인격체'로 인정받은 오랑우탄 산드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 판결 이후 자연스레 인류가 짊어지게 되는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동물원에서 인간을 상대로 전시된 채 살아가던 산드라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 속에서 인류 스스로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음화>는 실험정신이 충만한 다큐멘터리다. '음화'라는 한글 단어의 중층적 의미에 관심을 두는 이 영화는 '淫畫'(음란한 내용의 그림)에 초점을 맞춰 '陰話'(은밀한 이야기)를 '陰畫'(사진의 건판에 감광시켜 현상한 모양), 그러니까 네거티브 화면으로 보여준다. 에로티시즘에 관한 노골적이지만 '네거티브'한 영화.
극영화는 예년에 비해 확실히 침체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되는 극영화는 몇 가지 미덕을 보였다. 우선, <입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영화가 보여준 미니멀리즘의 성취를 꼽을 수 있다. 갑자기 고향집으로 돌아온 젊은 여성이 그곳에 살고 있는 낯선 여성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입춘>은 큰 사건이 없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 안에서 풍성한 감정의 흐름을 담아낸다. 여기에는 두 배우의 집중력 있는 연기도 큰 몫을 차지한다. 전세 사기를 당한 부부가 '전세 폭탄 돌리기'를 하려는 과정을 담은 영화 <잠 못 이루는 밤> 또한 내러티브의 힘보다는 캐릭터의 내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영화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매우 작고 단순하지만 뚜렷하고 확실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이 같은 흐름은 어쩌면 침체 국면의 영화산업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 또한 두드러졌다. 가족을 소재로 한 상당히 많은 출품작이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 중인 가족을 다루는 데 그친 것에 비해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잘 세워진 날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잠 못 이루는 밤>과 <입춘> 또한 가족 또는 대안가족이라는 세계를 건드리긴 하지만, <흘려보낸 여름>은 한국경쟁 상영작 중 가장 본격적으로 가족에 관해 언급하는 영화다. 봉고차에서 생활하면서 길 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가족은 깨어지기 직전의 상태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 끈질기고 집요하지만 애달픈 이 가족 구성원들의 삶을 통해 이 영화는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다.
극영화이면서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영화도 있다. <잔인한 낙관>은 한 미술가의 데뷔전을 계기로 보여지는 미술계 각 분야 인물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드라마적 구성을 통해 이 '미술판'을 조망하는 동시에 여러 영화적 장치를 활용해 일반적인 극영화의 세계를 확장시키려 한다. 주인공이 예전에 만든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노동자들이 해고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 <키노아이> 또한 대범한 표현과 묘사가 돋보인다. 이 영화는 사회 비판적인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관한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간과 인물이 제한된 가운데 이야기가 펼쳐짐에도 후반부까지 놀라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사랑에 관한,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를 담은 영화도 있다. <같은 계절을 보낸다는 건>은 강릉에 사는 여성과 원주에 사는 남성 사이의 연애담을 그리 가쁘지 않은 호흡으로 담아낸다. 만남과 관계의 발전, 감정의 멀어짐과 헤어짐, 그리고 재회처럼 흔하디 흔한 남녀의 이야기를 계절의 변화 속에서 엮어내는 이 영화는 그 보편적 감정의 흐름을 통해 소소하지만 조약돌처럼 단단한 삶의 진실을 들려준다. (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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