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신청한 극영화들 대다수는 예년에 비해 훨씬 미시화된 시선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영화들이었다. 물론, 정치 사회적 분노가 반드시 독립영화에 담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장르 규범으로 패턴화된 주류영화에 맞서 어떤 식으로든 괄호를 치고 독자성을 주장하는 영화들을 찾아야 하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입장에서 올해의 극영화들은 무기력한 사회적 분위기를 나름의 시선으로 돌파하는 영화들에 우선 주목하게 된다.
이를테면 황규일의 <샘>은 안면인식장애증인 주인공이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별난 코미디 감각으로 풀어낸 영화이다. 큰 웃음을 주는 건 아니지만 만날 때는 언제나 타인이 되는 관계의 일시성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관계의 반복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어떤 인생의 알맹이에 관한 비유를 끌어낸다. 이승원의 <해피뻐스데이> 역시 한 불우한 가족의 이야기를 괴이한 코미디로 풀어낸 영화인데 주어진 장애와 불행을 갖가지 기행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바닥에서 끌어올린 낙관의 힘을 느끼게 한다. 정형석의 <여수 밤바다>는 무대에 올린 연극이 망하자 머리도 식힐 겸 여수에 내려온 한 남자 연출가가 현지 사람들을 만나며 벌이는 일종의 연애 소동극인데 홍상수 영화의 한 설정을 빌린 듯한 도입부와는 달리 냉정한 인간 관찰기라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긴장이 풀린 듯한 등장인물들의 선한 행동을 통해 낙천적인 인간긍정의 여운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유지영의 <수성못>은 대구를 무대로 수성못에서 오리 배를 관리하는 여주인공이 서울 편입학을 준비하면서 맞닥뜨리는 그 자신과 동년배 젊은이들의 삶의 현실을 따스한 공감의 눈으로 관찰하는 영화이다. 이완수의 <노마드>는 식물성 인간인 주인공이 도시 근교의 낙후된 동네에서 나른한 분위기와 특이한 인물들에 둘러싸여 각박하지 않은 또 다른 삶의 면모를 체험하게 되는 광경을 담고 있다. 임태규의 <폭력의 씨앗>은 군대 내에서 벌어진 폭력의 뒤처리 때문에 갈등에 처한 주인공이 자신의 가정에서도 동일한 문제에 봉착한다는 내용을 격한 스타일의 호흡으로 담은 작품이다. 그밖에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에 출품된 민병국의 <천화>는 남자라는 동물에 대한 정직한 보고서이자 그런 남자 동물들을 보듬으면서도 자신을 단단하게 보호하며 삶의 어떤 이상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여성에 대한 초상으로서 흥미로우며, 허철의 <돌아온다> 역시 시골의 어느 막걸리 집을 무대로 활기 넘치는 한국판 샹그릴라의 이상향을 나름의 호흡으로 그린다.
다큐멘터리가 담아낸 쟁점들
올해 전주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들은 지난 몇 년간 논쟁적인 작품을 꾸준히 선정해 상영했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먼저, 한국경쟁부문에 오른 다큐멘터리들 가운데 감독 개인의 일상사에서 한국사회 전체의 일그러진 연대기를 들여다보는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도시 개발의 붐을 타고 부동산 투자에 인생을 걸었던 감독의 부모의 일생을 다루면서 한때 벼락부자가 되었으나 과다 투자로 인해 부도를 맞으면서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진 한 집안의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선호빈의 <B급 며느리>는 한국에서 흔히 겪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을 소재로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유산에 맞선 개인주의자인 젊은 여성의 반항을 시종일관 경쾌한 관찰 카메라로 따라가면서 현대적 삶의 형태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는 낡은 인습의 그림자를 자학적인 풍자로 담는다. 박문칠의 <파란나비효과>는 마을에 미국의 미사일이 배치가 되는 상황에 반대해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점차 평화주의의 맥락에서 사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들의 생활에 탁월하게 밀착한 카메라로 생생하게 증언한다. 우광훈, 데이빗 레드맨의 <금속활자의 비밀들>은 텔레비전 교양 다큐멘터리로 다룰 법한 소재를 낯선 문화에 접촉하는 이방인의 호기심이라는 필터를 통해 조명한다. 김지혜의 <홀로그램 유니버스> 역시 대중들에게 잊혀진 포크 듀오 그룹을 다루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 활동과 노동의 문제를 인간적인 배려의 눈길로 껴안는다.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부문에 초청된 다큐멘터리의 경향 역시 매우 다양하다. 백승우의 <국정교과서>는 왜 국수주의 성격을 지닌 정부에서 국정교과서 제도를 추진하는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조망하고 있으며 김희철의 <이중섭의 눈>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타계한 비운의 화가로 알려진 이중섭의 세계를 재연 드라마와 무성영화 초기의 연희 양식인 변사 제도를 활용해 재구성한 특이한 형식의 다큐멘터리이다. 박동현의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는 6.25 전쟁, 1980년 광주항쟁에 관한 기록필름을 활용하여 실제 역사적 사건의 면모와 그 사건을 특정 시각으로 받아들였던 감독의 자전적 기억을 병치시키며 역사적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이 감독 개인의 성장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성찰한다. 주현숙의 <빨간 벽돌>은 1980년대에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중년의 여성들과 현재의 젊은이들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다른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실존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는 다큐멘터리이다.
김보람의 <개의 역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어느 동네의 늙은 개의 죽음을 놓고 그 개의 운명뿐만 아니라 그 개를 둘러싼 사람들의 사연을 슬며시 들여다보는 작은 인류학적 기록지이다. 마지막으로 올해 가장 논쟁적인 다큐멘터리는 김재환의 <미스 프레지던트>인데 탄핵 당한 전 대통령 박근혜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밀착 취재해 노년층인 그들의 삶에 어떻게 박정희, 박근혜 부녀의 리더십이 신화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심층 취재한다.
김영진 전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