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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걸어온 길, 동시대의 삶을 껴안다_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2017-04-29 00:47:00

송길한은 많은 작품의 각본을 썼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중에는 중요한 작품도 있고 과소평가된 영화도 있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실패작도 있다. 1970년대에 그가 각본을 쓴 영화들은 한국영화사에 남을 만한 게 별로 없지만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198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건, 1970년대부터 쭉 영화사로부터 주문받은 각본을 빠른 속도로 써내며 연명했던, 그렇지만 삶에 대한 나름의 정직한 시선을 지켰던 송길한의 결기다.

송길한의 시나리오는 손목을 놀려 쓴 게 아니다. 관객을 의식하며 쓴 게 아니다. 그가 보는 인생과 사람에 대해 쓴 것이다. 그건 재능 이상의 문제다. 그가 체험한 동시대의 곡절을 그의 마음과 손을 빌어 옮기는 것이다. 당신이 뭔가 예술적 향기가 있는 과거의 한국영화를 봤다면 적지 않은 것들이 송길한의 각본이었을 것이다. 역사, 구원, 욕망, 분단, 윤리 등 거창한 테마를 갖고 있는 그의 각본에는 그의 일상적 성품을 반영하듯 인물들에 인간적인 숨결이 불어넣어져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현대적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며 그 세대의 역사적 상처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이런 인물들을 역사책의 딱딱한 글귀 속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이웃으로 보여주는 게 그의 저력이었다. 깊은 맛이 있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가끔 그 손맛의 주인이 겪은 신산스런 삶이 생각나서 울컥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여운을 그의 작품은 준다. 책상에서 머리로만 쓴 게 아니라 동시대의 삶의 상처의 흔적을 몸으로 껴안고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그런 글이다.

1970년대의 한국영화계는 최악의 불황에 시달렸고 한국영화를 아무도 보지 않던 시대였다. 정부로부터 허가받은 소수의 제작사들은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4편 제작했고 외화수입으로 돈을 벌었다. 한국영화는 외화수입권을 따내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했다. 1980년대에 그는 시나리오 작가를 그만 둘 각오로 다부지게 자기가 쓰고 싶은 소재에 매달렸는데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짝코>(1980)와 <만다라>(1981)는 송길한의 작품세계의 일종의 분수령이었다.

이제는 한국영화사에서 공인받은 작품이지만 개봉 당시에 <짝코>는 주목받지 못했다. <짝코>는 빨치산 망실공비와 그를 쫓는 지리산 토벌대 경찰의 평생에 걸친 추적극인데 그들은 자기 삶이 다 망가진 상태에서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쫓고 쫓긴다. 그들은 왜, 라는 질문을 죽기 직전에야 던진다. 잦은 플래시백으로 두 인물의 삶을 응축해 달려가는 이 영화의 각본은 기법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남한의 역사를 비유적으로 등치시키는 기적을 이뤄낸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중에 아직 이만한 무게를 지닌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기록할만한 작품들

송길한의 회고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송길한에게 작업을 의뢰하면서 늘 ‘어이 이번에 한 번 또 죽어볼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에 한 번 써볼 거야?’라는 말과 전혀 다른 그 필사적인 어감에서 이 세대에게 절실했던 체험의 육화라는 고전적인 글쓰기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동시대에 겪은 역사적 비극을 다시 스크린에 불러오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시 그 시절을 살아보려는 노력이 뒤따른다. 그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어서 오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다라>를 찍을 때 그는 헌팅을 위해 호남 일대를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돌아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들른 식당에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 장군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치를 떨곤 했다. ‘겨울공화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만다라>의 첫 장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가 군인들의 검문을 받고 자기 신분을 증명할 길 없는 지산 스님이 타박을 받는 스산하고 살벌한 풍경은 그런 공기에서 나온 것이다.

검열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창작의 산물들

송길한 스스로 자신의 최고작 중 한 편으로 꼽는 <만다라>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각색한 시나리오다. 영화의 배경이 겨울이라 눈이 녹기 전에 원고가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충무로 작가들이 단기간에 가는 허름한 여관에서 그는 만 나흘 동안 1분도 안자고 각색 작업을 했다. 조감독이 여관과 영화사를 오가며 송길한이 원고를 쓰는 대로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나흘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써낸 이 비상한 집중력의 산물이 <만다라>라는 것이다. 송길한의 작품은 <짝코>나 <길소뜸>(1985)등 분단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상흔을 소재로 한 것이나 <만다라>와 <비구니>에서처럼 불가적 구원이라는 큰 관념과 대결하는 소재와 만났을 때도 사람 사는 속내를 보여주는 찰진 친밀감을 준다. 그렇게 쓴 작품 대다수가 종종 허름한 여관방에서 단기간에 써내려간 결과물이라는 건 그의 평소 삶이 얼마나 촘촘한 경험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송길한의 불행이라면 그가 근기가 있었을 때 시대는 너무 옹졸하고 가혹했다는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는 곧 좋은 영화를 하려 해도 그걸 가로막았던 시대의 억압과 통한다. 송길한의 시나리오들을 읽으며 가장 통절한 것은 역사상 가장 굵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았던 송길한의 세대가 그때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왕성했던 시기를 군사독재정권의 검열이 지속되던 수십 년 동안 보냈다.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의 말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송길한이 대수로울 것도 없이 회고하는 검열에 관한 한 에피소드는 너무 징그러워서 정떨어지는 그 시절의 강압을 드러낸다. 강원도의 속초를 무대로 몸을 파는 다방 레지들의 삶을 그린 임권택 감독의 <티켓>이란 영화는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검열에서 고초를 겪었고 그 개별사례는 희극적이다.

송길한이 쓴 것들은, 특히 1980년대 이후 10여 년간 그가 쓴 것들은, 검열과 시한부 제작의 이중고 속에서 기적처럼 뚫고 나온 빛나는 창작정신의 산물들이다. 그것들은 문학에서 다뤄진 것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분단과 구원과 현대사를 오부지게 살았던 개인들의 정체성을 잔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긍휼한 시선을 품고 정교하게 그려낸 것들이다.

김영진 전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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