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juIFF #3호 [인터뷰]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성장통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성장통을 경험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오직 자신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성장통도 있다. 성장통을 겪는다는 건 언덕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일 같다. 그런 생각들이 이어져 '비밀의 언덕'이라는 제목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학년인 명은(문승아)에겐 비밀이 많다. 친구들과 선생님께 ‘아빠는 회사원이고 엄마는 가정주부’라 말했지만 사실 두 분은 함께 젓갈 가게를 운영한다. 가족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자꾸만 교묘한 거짓말로 변모한다. 그런 명은에게 혜진의 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치부를 적어내린 혜진의 솔직한 글이 큰 상을 타면서, 명은은 자신의 거짓말을 되돌아본다. '비밀의 언덕'은 거짓말과 솔직함 중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평가를 유보한 채 양측의 상황을 균형 있게 다루고, 명은이 스스로 성장통을 감내하는 여정을 사려 깊게 바라본다. 명은을 어리다는 편견에 가두지 않는 태도 또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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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개최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비밀의 언덕>이 처음 상영됐다. 국내 관객을 만나기에 앞서 해외 관객에게 선보인 소감이 궁금한데.
베를린에서 가장 좋았던 건, 관객들이 명은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한 인간으로 봐줬다는 것이다. 영화를 소개할 때나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명은이를 존중해 주고 있다고 느꼈다. 연출할 때 내가 의도한 점이기도 해서 기분이 좋았다.
<비밀의 언덕>의 시간적 배경은 1996년이다. 시기를 그 때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
1980~90년대 초중고 시절에 하던 가정환경 조사에 관해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부모님의 직업을 주로 언급하지만 사실 가정환경 조사에는 사는 동네, 부모님의 학력, 친한 친구 리스트 등 굳이 남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은 항목들이 많다. 그 종이 한 장으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논할 수 있겠더라. 더불어 새로운 10대 여성 캐릭터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다. 자기 주도적이고, 주체적이고, 개성 강한 독립적인 인간을. 그래서 첫 장편에 관해 고민하며 그동안 생각해오던 두 요소를 결합해 보았다.
199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세심하게 반영했다. 배우들의 의상과 소품을 보는 재미가 있더라.
처음 잡은 컨셉은 당시의 감성을 고증하자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만 통용되던 당시의 감성들, 예를 들면 핸드폰이 없던 시절 공고를 받아 적던 아이들의 감성, 당시 선생님들의 감성, 학부모들이 교실 창문의 커튼을 달아주는 독특한 상황 같은 걸 반영하려고 했다. 비주얼적인 측면에선 작은 소품들에 집중했다. 예를 들면 인물들의 헤어나 의상, 액세서리, 그리고 꽃 포장 스티커 같은 것들에 신경을 많이 썼다.
듣다 보니 명은이가 담임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과 꽃 포장 스티커를 문구점에서 오랜 시간 고르는 오프닝 신이 생각난다. 그 시절을 지나온 관객이라면 다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법한 장면이었다.
정말 오랜 시간 공들여 찍었다. 그 신을 찍은 날은 제작팀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웃음) 그 순간에 온전히 몰입한 명은이를 잘 찍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뉘앙스를 넣어 말하면 좋을지 문승아 배우에게 디테일하게 디렉션을 줬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테스트도 했다. 그때의 공기를 잘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음악도 넣지 않았다.
문승아 배우의 캐스팅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나.
처음엔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고 싶어서 8살부터 13살 배우까지 폭넓게 오디션을 봤다. 그러다 문승아 배우를 만난 거다. 밝게 웃으며 들어오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세련된 외모와 달리 입담이 구수해서 재밌었다. (웃음) 리허설 때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이 배우랑 같이 하면 기쁜 장면, 슬픈 장면을 다 재밌게 찍겠구나’라는 확신이 그때 생겼다. 명은이와 성격도, 시대도 달라서 처음에는 문승아 배우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명은이보다 학교생활을 더 열심히 하더라. 원래 그런 면이 있었는지 아니면 명은이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한 건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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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내 분위기가 자유로워 보였다. 현실감을 주기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초등학교에서 예술 강사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다. 그때 아이들의 학년별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고, 또 픽션일지라도 어디까지 선을 지켜 연출하면 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점이 생겼다. 대사 등을 내가 1차로 검수한 뒤에 문승아 배우와 함께 2차로 검수하는 과정을 거쳤다.
글짓기 대회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다. 매번 공들여 글을 쓰고 고민하는 명은이를 보면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릴 때 글짓기 대회에 많이 나갔다. (웃음) 명은이처럼 ‘어떤 글을 써야 상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여러 형식을 시도했었다. 그런데 대상작은 정말 차원이 다르더라. 아주 솔직하거나 형식이 독특하거나, 때로는 문학적인 글이 상을 받기도 했다. 글에 관한 명은이의 고민들, 명은이와 혜진이 글의 특성을 정리할 때 그 점을 많이 고려했다.
그런 면에서 명은과 혜진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거짓과 솔직함’으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대비는 명은이네 가족과 명은이 할아버지네 가족에게서도 명확히 드러나는 대비다.
명은이처럼 부모님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사람도 있지만 명은이의 오빠나 혜진이처럼 모든 걸 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맞고, 틀리다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양쪽 다 진중하게 보여주고 싶었고 솔직한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 중 과연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한 번쯤 관객들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학부 때 연극 연출을 전공했다. 어떤 계기로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됐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 그동안엔 그냥 즐길 목적으로 영화를 봤었는데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가 등장하는 순간, 그의 서스펜스, 조명, 무대, 그가 신은 뾰족한 구두, 장발머리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그때부터 꾸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몇몇 단편 영화 현장에서 영화의 메커니즘을 익혔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첫 장편 <비밀의 언덕>을 연출하게 됐다.
인물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길 선호하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볼 때 안톤 시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고 했고, <비밀의 언덕> 또한 독특한 10대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렇다. 재밌고 인상적인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고, 나 역시 캐릭터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편이다. 영화 <머니볼>을 좋아하는데, ‘빌리(브래드 피트)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을까’하는 상상을 자주 한다.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길 소망한다.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연출하고 싶다. 명은이도 관객들에게 그런 캐릭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앞으로도 문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에서 작품을 시작할 것 같다.
<비밀의 언덕>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나.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이 오묘하게 결합된 무대를 배경으로 한 인물의 매혹적인 수난기를 다뤄볼 생각이다. 지금 대략적인 골격은 나온 상태다. <비밀의 언덕>보다 규모가 커지고 정서적인 면에서 약간의 판타지도 가미될 것 같다.
[글·조현나, 사진·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