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인터뷰: 저스틴 H. 민의 기억 장치에 저장된 ´애프터 양´의 조각들
2022-05-01 18:43:00

JeonjuIFF #4호 [인터뷰] 저스틴 H. 민의 기억 장치에 저장된 '애프터 양'의 조각들

그의 내한 소식에 깜짝 놀라 전주로 달려온 사람과, “그 사람 잘 몰랐는데 인기가 엄청나다며?”로 시작해 <애프터 양>을 거친 뒤 앞으로 그의 팬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저스틴 H. 민에 관한 분분한 입장은 상이하게 시작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곳은 대체로 강렬한 호기심과 미소 가득한 애호의 자리다. 영화 <콜럼버스>, Apple TV+ 시리즈 <파친코>의 코고나다 감독이 만든 SF 영화 <애프터 양> 속 ‘양’인 저스틴 H. 민을 영화의 거리 언저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엄브렐라 아카데미>의 유령 벤 하그리브스 역할을 통해 빠르게 한국 팬덤을 확보한 그는 SNS를 통해 결집하는 뉴미디어 시대에 스타 탄생의 새 경로가 어떠한지를 몸소 선보인 인물.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2백만명이 넘는 이 스타의 매력은 <엄브렐라 아카데미>에서는 발산의 연기로, <애프터 양>에서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수렴의 연기로 드러난다. 인간으로서 로봇을 연기한다는 것, 아시아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유산을 품고 중국인 로봇을 연기한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가 <애프터 양>에서 경험한 변화의 진폭을 담았다.

{image:1;}

축하한다. 첫 장편영화 데뷔작인 <애프터 양>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된 데 이어 무척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운이 좋았고 당연히 엄청나게 기쁘다. 한편 조금은 무섭기도 하다. 혼자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재밌고 특별한 감흥이 다음에도 또 존재할까? 나는 더 잘할 수 있을까? 이게 커리어의 끝이면 어쩌지?’ (웃음)

코고나다 감독에게 처음 양 역할을 제안받은 경로는.

오디션 과정은 매우 표준적인 절차를 따랐다. 코고나다 감독을 만날 무렵에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는데… 긴 이야기를 짧게 줄여보자면, 사실 그 때 아주 큰 프로젝트에서 역할을 따내기 직전까지 갔다가 떨어진 직후여서 크게 상심한 상태였다. 어딘가로 잠시 떠나 있기로 결심하고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에이전시가 내게 대본을 건넸다. “저스틴, 지금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한번 꼭 읽어봐요.” 그 말을 듣고 대본을 꺼냈더니 첫 페이지에 코고나다라고 써 있는 거다! 그의 전작인 <콜럼버스>, 그리고 여러 비디오 에세이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흥분한 상태로 비행기에서 대본을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얼마 뒤 한참 울고 있는 내게 옆자리의 여성분이 괜찮냐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이 영화에 출연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답했고, 이후 코고나다 감독의 연락을 받아 함께 커피를 마셨다. 30분 정도로 예정된 간단한 미팅이 3시간에 달할 동안 그와 깊이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내가 겪어본 가장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는 동양의 문화에서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침묵의 순간이 우리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며 얼마나 중대하고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했다. 사실 미팅을 끝내고 이 정도면 자연스럽게 캐스팅으로 이어지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코고나다 감독은 아주 온화하게 웃으면서 “최종 오디션 때 봐요”라고 말했고 (웃음), 마지막 오디션 후 이틀만에 캐스팅 소식을 전해들었다.

할리우드에서의 일반적인 경험과 코고나다 감독과의 작업 사이에 문화적 차이점이 있었을까.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로서 살아남는 일은 사실상 끊임없이 자기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과정에 가깝다. 코고나다와 작업하는 동안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와 함께 일하기 전까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나와 내가 맡은 캐릭터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는지, 또 외양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지 제작진을 설득시키는 것에 그냥 익숙해져 버린 거다. <애프터 양>의 촬영장에선 그런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에 배우로서 어느 때보다 안심이 됐다. 안전지대에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제이크(콜린 파렐)와 키라(조디 터너-스미스) 부부는 중국에서 입양한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라위자야)를 위해 중국 문화를 일깨워줄 ‘세컨드 시블링스’로 양을 구입한다. 극 중에선 이런 안드로이드를 ‘문화 테크노’로 분류한다. 코고나다 감독은 양이 안드로이드란 사실만큼이나 아시아성을 중요하게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배우로서 당신은 이 아시아성에 관해 어떤 시각으로 접근했나.

대본을 처음 읽고난 이후부터 이 영화가 아시아성을 매우 중요한 주제로 탐구한다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 부분에 골몰했다. 사실 나 자신이 가진 ‘아시아적인 것’의 본질과 그것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생각은 <애프터 양>을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내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살지만 한국인의 외양을 지녔다. 내 가족은 한국인이고 나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한국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간을 모두 합하면 나의 총합은 오히려 미국인에 더 가까울 것이다. 결국 아시아적인 것이란, 만약 언젠가 제이크처럼 내게도 자녀가 생긴다면, 그 아이들에게 내가 물려주고 싶은 유산과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걸 알아가는 건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다. 물려주고 일깨워줄 만큼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나 스스로 가려내야만 하니까.

양과 미카를 중국인으로 설정한 것 또한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배우와 감독은 한국계지만 영화 속에서 아시아성을 논의할 민족적 정체성으로 중국인을 택한 이유에 대해 감독과 논의해 본 적이 있나.

<애프터 양> 공개 이후 단 한번도 그 질문을 받은 적이 없다. 실은 아무도 그걸 물어보지 않는 게 조금은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이번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에서는 어떤 동양인이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잘 알아보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신경쓰지 않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무리봐도 내가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데, 미국 관객들은 내가 중국인 로봇을 연기해도 그다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코고나다 감독은 바로 이 아이러니를 건드리고 싶어했다.

움직임을 최소화한 표현으로 한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우주처럼 펼쳐낸다. <애프터 양>의 미니멀한 연기는 <엄브렐라 아카데미>와 사뭇 대조적이기도 한데.

매우 다른 연기 경험이었다,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최소한으로 줄인 표현만으로 인물에 접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꿈꿔온 연기 방식이었다. 한번은 코고나다 감독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겉으로 아무리 잠잠해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창문을 열어 안쪽 풍경을 바라보면 누구에게나 믿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시간과 진귀한 내면이 자리잡고 있을 거라고.

양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또 얼마나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를 이성적으로 설계한 뒤 연기했나. 극 중 설정과 별개로 현실의 배우가 양의 감정을 인간적으로 진실하게 느끼려 했는지, 혹은 로봇에 가깝게 느낌이나 감정의 농도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려 시도했는지 궁금하다.

코고나다 감독에게 내가 처음 질문한 게 바로 그거였는데, 감독님은 절대 답해주지 않았다. “난 잘 모르겠어, 그거야말로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라는 식의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웃음) 그래서 촬영 중에도 매일이 탐색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야속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코고나다 감독은 양이 과연 얼마나 인간적인가에 대하여 양의 주변인물들과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점이 역설적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짓는다. 양은 가끔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나 자신만 봐도 그런데, 가끔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고 당장 몇 초뒤에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할 지도 모르고, 종종 어리석게 군다. 연기를 할 때도 바로 그런 혼란과 여백을 자연스레 남겨두려 했다. 배우로서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영화의 핵심 설정 중 하나로 양의 숨겨진 기억장치가 등장한다. 양이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시간은 1회에 단 3초인데, 그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더더욱 저장된 순간들이 진실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배우 저스틴 H. 민에게도 <애프터 양>의 촬영장에서 그런 순간이 있었을까.

아! 듣자마자 확실히 답할 수 있는 한 순간이 떠올랐다. 영화 촬영 기간 동안 우리는 내내 작중 배경이 된 제이크의 집 바로 옆집을 빌려서 그곳에 머물렀다. 나, 콜린, 조디, 말레아 모두 각자의 방에서 자고는 아침마다 커다란 식탁에 모여서 가족처럼 식사를 한 뒤, 잠시 후 바로 옆집으로 이동해 가족의 삶을 연기했다. 영화 속 집에서 살다가 촬영이 끝나면 바로 몇 걸음 떨어진 또다른 가족의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일, 정말이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image:2;}

여기 전주 영화의 거리 이곳 저곳을 모두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것처럼?

바로 그렇다! 아직도 아침 메뉴가 속속들이 다 기억난다. 매일 아침 따뜻한 커피와 빵, 그리고 프로듀서가 만들어 준 달걀 요리를 먹고 옆집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이 내게 분명히 저장되어 있다.

[글·김소미, 사진·오계옥]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