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인터뷰: <정순> 정지혜 감독, 디지털 성범죄는 젊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2-05-03 19:15:00

JeonjuIFF #6호 [인터뷰] <정순> 정지혜 감독, 디지털 성범죄는 젊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혼을 앞둔 딸과 단둘이 살던 정순(김금순)은 영수(조현우)를 만나 어렵사리 마음을 나눈다. 그러나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영수가 정순의 내밀한 영상을 동료들에게 유포하면서 일상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영화 <정순>의 이야기다. 정지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논의에서 쉬이 언급되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디지털 성범죄는 젊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평소 함께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두 소재를 시나리오에 녹여내고자 한다는 정지혜 감독은 한 중년 여성이 사고처럼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으로부터 선입견을 깬 서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단편 <면도> <매혈기> <버티고>에서 보여준 불평등에 관한 풍자보다는 무겁지만, 약간의 위트와 아스라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 작품이다. 정지혜 감독에게 첫 장편 <정순>을 제작한 전후의 사정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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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학교에 다니던 중 휴학을 하고 정순처럼 식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막연하게 공장의 이모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공장에 근무할 때는 이모님들과 12시간 이상 시간을 함께 보냈다. 엄마보다도 가깝게 지내던 이모들이 행동하시는 걸 보면서 우리 엄마도 일을 하러 갔을 땐 이모님들의 모습과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관찰했던 것들을 시나리오에 많이 담으려했다.

‘디지털’과 ‘중년’. 쉽사리 함께 연상되지 않는 두 키워드를 과감하게 묶어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무렵만 해도 N번방 사건이 있기 이전이어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디지털’이라는 측면 때문에 젊은 연령대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를 떠올리기 쉽다. 그런 선입견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게 시나리오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사회적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사건들이 공론화됐다. 그럼에도 중년이 디지털 성범죄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목소리는 여전히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며 느낀 점도 영화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공장이라는 공간은 사람도 기계의 부품 중 하나처럼 감각케 하는 곳이다. 그러한 구조에 오랜 시간 머물다보면 때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노출되기도 한다. 공장의 이모님들은 때때로 닥치는 어려움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내셨다. 그런 지점을 쓰고 싶었다. <정순>을 쓰면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도 있지만, 중년 여성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소재를 다루며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디지털 성범죄를 표현하는 부분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를 관객들에게 보여드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혹여나 영화를 관람하면서 불편함을 느낄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제작진들과 대화를 나누며 문제를 풀어가려 노력했다.

<정순>의 주된 무대는 경상남도 양산시다. 지방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첫 장편 작품이다 보니 가장 익숙한 장소를 택했다. 고향이 양산이어서,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양산의 어떤 풍경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촬영도 자연스럽게 양산에서 진행하게 됐고, 경남에서 영화제작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다. 사실 지역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서울에 비해 인프라가 적다는 난점이 있다. 나도 장편영화 제작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이 부산 내에서 충원되지 않아 서울에 계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촬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지역 내 영화인들끼리 더 가깝게 지내고 서로 도움을 건네는 일이 많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다.

독립영화계에서 뼈가 굵은 김금순 배우를 정순 역에 캐스팅하는 과정은 어땠는지.

<정순>의 캐스팅 리스트를 만들고 있을 무렵 프로듀서가 김금순 배우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도 김금순 배우가 출연한 단편영화를 보고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실제로 배우님을 만나 뵐 기회가 생겼는데, 뵙자마자 내가 그리는 정순과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순이 세월 지나며 힘든 일이 있더라도 소녀 같은 면을 잃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싶었는데, 김금순 배우가 인물의 설정부터 디테일한 묘사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정순이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이 있다. 첫 장편이다 보니 장면 구성에 애를 먹고 있었는데, 그때 배우님이 나를 방으로 불러 해당 장면을 시연하며 함께 고민해주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든다.

영상을 유출한 후 정순을 찾아가 선처를 바란다고 말한 영수가 기억에 남는다. 정순의 새로운 연인이면서 동시에 사건의 가해자인 영수 캐릭터를 그릴 때 난점은 없었나.

가해자의 서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영수의 이야기는 크게 부각하지 않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중년 남성 근로자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디지털 성범죄자가 익명성을 무기로 삼고 가해를 하는 모습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서 평범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가해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수 역을 맡은 조현우 배우가 힘들어한 부분이 있었다. 초반에는 정순과 사랑을 나누던 인물의 이야기가 극 후반으로 갈수록 생략된 부분이 많아 묘사에 어려움이 있으셨던 것 같다. 영수 캐릭터에 대해서도 배우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구성해갔다.

단편영화 <면도>에서도 일상 곳곳에 자리한 성차별, 성폭력 문제를 다뤘다. <정순>과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다면.

<면도>를 작업하면서는 “우리도 작품 속 주인공처럼 한 번 질러보자. 우리도 할 수 있다” 같은 용기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런 면에서는 <정순>과 유사한 부분도 없지 않다. 다만 <정순>을 만들면서는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말들을 던지는 게 아닐까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면도>에서만큼 직접적인 용기를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한 번 계속 살아보자”는 정도의 마음만은 전하고 싶었다.

앞으로 더 말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정순을 마칠 무렵부터 생각하고 있던 소재가 있다. 방황기에 있는 중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다. 아직은 구상 중에 있지만, 올해가 지나기 전에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글·정예인, 사진·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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