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인터뷰: <내가 누워있을 때> 최정문 감독, 결국 사람의 이야기
2022-05-06 14:37:00

JeonjuIFF #9호 [인터뷰] <내가 누워있을 때> 최정문 감독, 결국 사람의 이야기

비 온 뒤에 땅 굳는다. 달리 말해, 땅이 굳으려면 비가 와야 한다. <내가 누워있을 때>의 선아, 지수, 보미는 비를 흠뻑 맞는 인물들이다. 지수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촌 언니인 선아네에 얹혀살고 있다. 선아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사촌 동생과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에 시달린다. 짊어진 무게 탓에 선아는 회사 선배와의 부적절한 관계와 주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포기하지 못한다. 지수의 친구 보미는 전 애인의 무책임한 태도와 몹쓸 짓으로 인해 소중한 아이를 잃었고, 이로 인한 환각·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순탄치 않은 삶을 영위하는 선아, 지수, 보미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 목적지는 지수 부모의 산소. 하늘도 무심하지, 차 사고가 나는 것도 모자라 카센터 직원이 그녀들을 얕잡아 보며 위협하기에 이른다. 좁은 모텔방으로 피신한 셋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연 이들이 서로의 과거를 따뜻이 보듬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땅이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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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비행기에 탄 선아의 모습이고 중심 줄거리도 세 주인공이 차를 타고 떠나는 이야기다. 전작인 <노포동>, <신탄진> 역시 버스,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로드 무비를 선호하고 꾸준히 택하고 있다. <내가 누워있을 때>는 ‘로드 드라마’로 설명하고 있다. 인물들이 어딘가로 향한다는 움직임이 좋다. 내 영화는 주로 인물의 내면적 변화에 집중하는데, 형식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프로덕션 측면에서도 실내보다 실외 촬영을 더 좋아한다. 이제 탈것 중엔 자전거와 오토바이만 남았다. (웃음)

인물들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각각 재생된다. 현재와 과거가 연신 교차하는 이야기 구조를 택한 이유는?

<내가 누워있을 때>의 메인 플롯은 세 인물이 사고를 당하고 카센터 직원을 만나면서 겪는 갈등이지만, 더 중요히 여긴 건 과거의 사연들이다. 선아, 지수, 보미가 일련의 사건을 헤쳐나가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들도 같이 해결했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보통 영화에서 과거로 시점을 돌리면 화면의 톤이 다운된다. 반면 <내가 누워있을 때>는 현재보다 과거를 더 선명한 색으로 연출해 플래시백을 더 돋보이도록 만들었다. 인물 별로 선아는 파란색과 능소화색, 지수는 노란색과 분홍색, 보미는 보라색으로 주색을 설정해 각자의 성격과 감정이 잘 살아나도록 했다.

언급한 선아, 지수, 보미의 어려움은 이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문제들이다. 사내 성차별이나 왕따, 여성의 성적 취향을 무조건 비난하는 풍토 등. 심지어 보미는 사산과 연인의 방치라는 큰 아픔을 겪기도 한다. 여성들이 마주하는 불편함에 주목한 이유는?

아주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그냥 내가 이 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아픔, 내 또래가 가지는 고민거리들을 자연스럽게 꺼내던 와중 이런 이야기와 인물들이 만들어졌다. 내가 바란 건 단지 선아, 지수, 보미가 잘 살고 잘 자면 좋겠다는 소망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더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했고, 그곳에 여러 불편함이 있었다. 이 불편함들을 마주한 인물들의 감정을 영화적 순간으로 포착하고 싶었다.

이들 중 선아는 제일 어른이면서 가장 큰 내면적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반면 사촌 동생 지수는 어린 나이에도 깊은 속내를 보이며 선아의 성장을 이끈다. 회사 동료 수진도 멀리 있지만 늘 선아를 아껴준다. 선아를 둘러싼 인물 관계가 흥미롭다.

선아는 헛똑똑이다. <내가 누워있을 때>는 이런 선아의 성장기라고 생각한다. 동생들이 보기엔 멋진 사회인이지만, 사실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자신이 어떻게 변해있는지조차 모르는 인물이다. 본인의 일에 욕심이 가득하면서도 가족부양이나 사촌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에 내내 방황한다. 반면 지수는 과거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깊게 고민하며 엄청난 고통의 수반을 겪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정한 인물이다. 어려움을 마주해 본 지수가 사랑으로 선아를 응원하며 따뜻한 감정을 주고받길 원했다. 물론 이 과정에 갈등이 있더라도 괜찮다. 어떤 변화가 생기기 위해서는 영화 속의 차 사고처럼 내면의 충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 변화하는 건 많이 없다고 느낀다. 선아가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고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조력자 수진의 역할도 크다. 편견 없이 선아 옆을 지켜준, 몸과 마음을 기대게 해준 수진이 있었기에 선아는 성장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옆에서 쓴소리도 해주고, 항상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누워있을 때>의 인물들이 이렇게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며 성장하길 바랐다. 나 역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이들과 같이 한 발짝 성장한 것 같다. 기분이 좋다.

보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헛것’을 본다는 신체적·정신적 증후로까지 발현한다. 마음을 가장 쓰라리게 하는 인물이다.

보미는 사산아 진이를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한다. 그게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방법일지라도 보미는 과거의 아픔과 당당히 마주할 줄 아는 큰 사람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꿋꿋이 애도를 표하는 용기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싶었다. 난 독특함을 특별함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회가 규정한 평범함에 맞추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것을 잃지 않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슬픔과 발랄함을 동시에 갖춰야 하기에 연기하기 어려운 인물인데, 박보람 배우가 특유의 엉뚱함과 사랑스러움을 토대로 너무도 잘 표현해줘서 고맙다.

배우를 향한 애정이 깊어 보인다.

끝없이 자랑하고 싶다. (웃음) 선아 역의 정지인 배우는 매 촬영장에서 시나리오를 복기하면서 현장의 흐름까지 잡아주는 대단한 사람이다. 작품에 진지한 책임감을 쏟는 모습이 선아와도 똑 닮아 보였다. 선아 캐릭터를 구상하는 게 어려웠는데, 정지인 배우의 실제 모습 덕에 시나리오까지 술술 풀렸던 기억도 있다. 지수는 원래 더 어린 나이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우리 배우를 보자마자 인물의 나이대를 바꿨다. 지수의 서사는 다른 인물보다 예민한 감정선을 따라야 한다. 오우리 배우의 얼굴에는 무뚝뚝함과 따뜻한 슬픔, 그러면서도 씩씩한 귀여움과 굳은 심지까지 다양한 감수성이 서려 있어 지수 역을 정말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

지수의 연인이었던 수연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녀의 책상 위에 붙어 있던 글귀가 떠오른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어떤 의미였나?

영화 속에서 수연이가 지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테고, 내가 관객과 나누고 싶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사람에 관해 표현하고 연출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수록 점점 더 사람을 모르겠다. 상대방에 관해 생각하는 일,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을 쓰는 일이 너무 어렵다. 감정이입에서 더 나아가 상대방이 할 수 있는 상상까지 해보려 노력 중이다.

[글·이우빈, 사진·오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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