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박수연, 이유미, “아름다운 동화에도 폭력은 존재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 종말을 예언했던 1999년은 혼란스러웠다. 2000년이 되는 순간 컴퓨터가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모든 분야가 마비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학교에선 대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는 식으로 수위 높은 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이하 <우.천.사>)의 고등학교 태권도 부원 주영(박수연)과 소년원 학교를 다니는 예지(이유미)의 사랑은 세기에 싹 텄기에 더 순수하고 순진할 수 있다. 1991년생 박수연과 1994년생 이유미에게 1999년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과거는 아니지만,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순진한 믿음은 10대 시절을 거쳐 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공감할 수 있는 코드다. 영화 첫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GV) 참석을 위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박수연과 이유미를 만났다.
- 한제이 감독이 직접 전화를 걸어 <우.천.사> 캐스팅을 제안했다고 들었다.
박수연 밤 9시쯤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있었다. 야외에서 20분 정도 걸으면서 전화를 하게 됐는데 제목을 듣자마자 호기심이 생겼다. 기존에 내가 어두운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다면 이번에는 굉장히 밝은 인물을 연기할 테니 배우 박수연에게도 좋은 일일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웃음)
이유미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것은 ‘온기’였다. 마음이 따뜻하고 깨끗해졌다. 감독님과 미팅을 가질 때 햇살이 비추는 느낌이 아름다 동화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감독님이 너무 재밌는 분이라 첫 만남 때부터 굉장히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만난 주영과 예지는 어떤 아이였나. 실제 본인 모습과 얼마나 닮았다고 느꼈나.
박수연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내겐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있다. 보통 독립영화에 어두운 캐릭터가 많다 보니 밝은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는데, 한제이 감독님이 그냥 평소 모습 그대로 연기하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촬영 기간에 우울한 작품도 보지 말고 그저 극도의 즐거움만 생각하며 지내라고 했다.
이유미 평소에 무척 밝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는 성격이라 어떻게 보면 예지 캐릭터와 성격 면에서는 많이 다를 수 있다. 처음엔 현장에서 장난을 자제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웃음) 그런데 원래 성격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예지다운 잔잔함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너무 예지 캐릭터에만 집중했다면 오히려 한정적인 연기를 했을 텐데, 평소 내 모습과 예지를 연기할 때의 격차가 오히려 연기적 틀을 넓게 만들어준 것 같다.
박수연 사실 이유미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말을 듣고 이미지화가 너무 잘 됐다. 유미를 알던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웃음)유미 아닌 예지였다면 내가 쉽게 하겠다고 하지 못했을 것 같다.
- 독립영화계에서 인연이 닿았을 법도 한데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고.
이유미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어떻게 보며 극중 주영과 예지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박수연 그래서 다행이었던 것 같다. (웃음)
이유미 내 성격을 알았다면 언니가 이입을 못했을 수도 있지. 나를 모르니까 예지 캐릭터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진짜 얘를 사랑할 수 있나? (웃음)
- 제목이 독특한 영화다. 처음 들었을 땐 어떻게 다가왔나.
이유미 굉장히 시적인 제목이다. 제목이 짧을수록 어떤 이야기인지 추측하게 되는데, <우.천.사>는 제목이 시나리오를 정확하게 설명해줬다. 그 점이 내게 잘 맞았다.
박수연 갈등이 있겠지만 결국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할 수 있겠지’ 라는 문장이 곧 사랑의 가치를 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목에 끌렸다.
- 박수연 배우는 고등학교 태권도 부원 주영을 연기하기 위해 신체 훈련을 받아야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영의 철이 없지만 순수하고 순진하기까지 한 내면을 어떻게 이해해나갔나.
박수연 초중학교 때 3년 정도 태권도를 했었기 때문에 감독님과 통화할 때도 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막상 훈련을 시작하니 몸은 다 까먹었더라. (웃음) 한달 반 정도 액션 스쿨에서 함께 훈련했다. 원래 민호 역의 김현목, 성희 역의 신기환과 친해서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또래 친구들끼리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 소년원 학교를 다니는 예지는 배우 이유미가 해왔던, 이른바 센 역할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이지만 영화가 이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나 배우의 연기 방식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유미 상황만 따지면 내가 지금껏 연기해온 캐릭터와 접점이 있는 것 같지만, <우.천.사>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좀더 나근나근한 느낌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가장 일상적이고 편안한 상태에서, 모두가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발견할 수 있는 예지의 매력을 보여주려고 했다.
- 퀴어영화이기에 더 어려운 연기라거나 도전적이라고 보는 시선 자체가 차별적이긴 하지만, <우.천.사> 올해 전주영화제 한국경쟁 섹션에서 <폭설>과 함께 퀴어영화라는 점에서 주목받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이건 평생 하나뿐인 첫사랑의 의미를 담아 연기해야다. 주영과 예지의 로맨스를 어떻게 접근해나갔나.
박수연 주영은 발산적이고 어디에도 메이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불안정하다. 예지는 강인하고 나근나근한데, 가까이 다가가면 한없이 마음을 내어주고 연약함도 드러낸다. 두 캐릭터의 상호작용이 무척 좋았다.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감독님과 “주인공들이 성정체성을 깨닫고 갈등하는 이야기는 아예 없어도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예지는 이미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주영은 예지를 만나고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됐을 것이다. 둘의 관계성에서 너무 가능한 사랑의 형태였다.
이유미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정말 기분 좋은 동화를 본 느낌이었다. 예지는 얼마나 매력적인 친구이길래 주영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예지가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이렇게 순수한 사랑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너무 당연하게 느껴져서 멋있어 보였다.
- 박수연 배우는 1991년생, 이유미 배우는 1994년생이다. 1999년 하면 어떤 기이 떠오르나.
박수연 IMF에 관한 기억은 생생하다.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유미 당시 한국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오히려 낯선 세계의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생경하게 느껴진다. 시대물을 찍는 배우에겐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잠깐잠깐 경험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우.천.사>가 더 아름다운 동화처럼 느껴졌다.
- 1999년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나이대는 아니지만, <우.천.사>를 찍으면서 세기말 한국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게 되지 않았을까.
이유미 아름다운 동화에도 폭력은 존재한다. 어느 시대든 폭력이 있지만 그 시대에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아 무섭고 화도 났다. 그런 의미에서 <우.천.사>는 폭력에 대항하는 어떤 영웅 동화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연 주영이 속한 태권도부에서는 물리적인 폭력이 너무 당연시되어 있다. 지금은 이게 잘못됐다는 각성이 있지만 그때는 폭력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지속되다 보니 그 안의 사람들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한다.
- 실제 10대 시절엔 어땠나. 좋아하는 것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10대 시절에만 가능한 순수함이 있던 학생이었나.
이유미 어릴 때부터 연기 활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우정이나 사랑 같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내 꿈이 너무 중요해서 감정을 소홀히 했다. 어렸을 때 연기했던 모습을 가끔 찾아보면 “쟤 많이 순수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웃음) 오로지 일만 생각했던 그 시절이 오히려 더 순수하게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우정과 사랑을 지키고 싶은 지금, 예전보다 좋은 방향으로 성장한 것 같다.
박수연 연기는 스무 살 때부터 하고 싶었기 때문에 10대는 평범한 10대처럼 보냈다. 그때는 내가 내 마음대로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내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면 상대도 나를 좋아해줄 거라고 당연하게 기대했다.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초연함이 있지만 그때는 감정에 흠뻑 젖어서 관계를 맺었다.
- 두 배우 모두 독립영화와 인연이 깊다. 다수의 독립영화 작업을 한 궤적이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배우에게 독립영화나 영화제는 어떤 의미인가.
박수연 독립영화로 시작했던 건 일을 많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 다양한 이야기에 전부 마음이 갔다면, 최근 1~2년은 작품을 많이 하진 않았다. 예전엔 관계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면 30대 초반에는 진로나 미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끌리는 등 개인적인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는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마음이 가는 작품도 달라질 것 같다.
이유미 상업영화도 상업영화만의 매력이 있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독립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소수의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도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좋아했다. 요즘도 시나리오를 보다 보면 뭔가 색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은 독립영화인 경우가 많다. 남들이 쉽게 하지 않을 것 같은 캐릭터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독립영화 작업에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