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매거진』 ‘가족’이라는 미스터리 〈엄마의 왕국〉 이상학 감독
2024-05-04 18:05:00

전작 단편 목록을 보면 그간 가족 관계를 자주 다뤄온 듯하다. 〈엄마의 왕국〉 역시 엄마와 아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가족 이야기에 오래 관심을 기울여온 까닭이 있을까?

첫 번째 이유는 가족은 인간의 선천적 특성과 후천적 특성을 세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이상,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집단을 만들고 해체하는 과정을 겪는데, 우리가 겪는 다양한 감정과 딜레마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족이기 때문에’라는 전제를 통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는 매우 많고, 또한 이 전제를 사용했을 때 촉발되는 본능적인 감정과 서로 다른 견해 간의 충돌은 관객들이 극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 아닌 작품을 집필하더라도 많은 작가들이 주요 인물의 원가족 및 형성 가족, 대안 가족 관계를 설정하고 인물의 전사를 구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독립영화에서 ‘가족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맹렬한 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현시점을 사는 가족이나 소규모 집단의 관계를 이야기 중심에 두면, 영화 제작 시 인물 숫자와 공간 숫자를 줄일 수 있어 제작비 절감에 도움이 된다. 소규모 집단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늘 다양한 색채의 장소를 담고 싶다는 바람과 다중 인물이 움직이는 격동의 시퀀스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는데, 이는 제작비라는 거대한 괴물을 만나면서 종종 기화된다. 좁은 공간의 드라마를 벗어나기 위해 신과 인물 수를 늘릴수록 각 신에 배치된 제작비가 점점 줄어들게 되고, 각 신을 구축하기 위한 제작비가 줄어들수록 개별 장면을 시네마틱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놓여 있는 심정을 느낀다. 나는 이 심정을 탈출하기 위해서 복잡한 전사를 가진 소규모 가족의 이야기를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다루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족이라는 소재가 가진 원초적인 힘을 사용하되, 그 힘의 방향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돌려 새로운 극적 긴장감을 만드는 플롯을 만들고자 했다. 언젠가는 가족 이야기를 하더라도 에이리언이 숨어 있는 노스트로모호에 탄 대가족의 이야기라거나, 시공간을 루프하며 부모의 부모와 자녀의 자녀를 만나는 판타스틱한 코미디 복수극도 만들어볼 수 있기를 종종 소망한다.

〈엄마의 왕국〉은 치매 노모를 돌보는 가족 드라마로 시작해 미스터리, 범죄 장르로 서서히 변화한다. 그리고 각각의 장르가 가진 특성을 적재적소에 녹여내고 있다. 어떤 장르적 특성을 가진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이 영화는 가족, 거짓, 비밀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가?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실과 거짓 중 무엇이 필요할까? 가족에게 비밀은 불행의 씨앗일까 아니면 행복의 씨앗일까?’라는 질문이 〈엄마의 왕국〉을 구축하는 극의 핵심이자, 장르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서로 충돌하는 영화 장르가 함께 있을 때, 가족의 속성과 인간이 믿는 진실의 속성에 대한 미스터리한 질문을 던지는 극이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가족’이라는 독특한 집단은 본질적으로 따뜻한 휴먼드라마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미스터리의 속성 또한 지닌다. 부모와 자녀가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며 따뜻한 휴먼드라마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기에 가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가족에게 자기 욕망을 투사하거나 환영을 씌우는 미스터리를 저지르기도 하며,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타인에게 해가 되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가족’의 다양한 속성을 극화된 영상 이야기에 녹여내기 위해서는 여러 장르의 특성이 함께 필요했다. 이 작품을 기획할 때 스스로 떠올렸던 두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률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초록 잔디밭 안에 거꾸로 꽂혀 있는 단 하나의 날카로운 바늘 이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작고 예쁜 일각처럼 보이지만 심해에는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몸집을 숨겨놓은 빙산 이미지였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다시 보고 깊이 볼수록 새로운 진실이 보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에게 ‘장르영화’는 이야기의 핵심을 장르의 형식에 숨기는 형태로 인식되는데, 장르의 형식 속에 숨은 서사를 재해석해 보는 것도 〈엄마의 왕국〉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처럼 〈엄마의 왕국〉도 치매 환자를 주요 서술자 자리에 둔다. 때문에 관객은 화자의 말을 필연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엄마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점에서 미스터리가 더욱 극화하는 부분이 있기도 한데, 이러한 설정을 하면서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표면적으로 볼 때 영화 속 시간은 주경희(남기애)의 치매 증상이 악화돼 가는 흐름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주경희는 관객들에게 증상이 심해지는 치매 환자로 보여야 했고, 이 설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첫 번째로 중요했다. 주경희 역을 맡은 남기애 배우는 이러한 치매 환자의 외면과 내면을 연기해야 했고, 도지욱 역을 맡은 한기장 배우는 치매 환자가 된 엄마와 살아가는 아들의 외면과 내면을 연기해야 했으며, 각 부서의 감독들과 스태프들은 악화되는 치매 증상과 사건을 영상에 담기 위해서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해야 했다. 여기서 주연배우에게는 한층 더 어려운 과제가 부여되었는데, 이는 ‘과연 치매 환자 주경희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지금은 정상 상태의 주경희인가, 치매 증상을 겪는 주경희인가?’ ‘도지욱은 주경희의 말과 상태를 어디까지 믿고 있는가?’ ‘도지욱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등의 질문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심층적으로 볼 때 〈엄마의 왕국〉은 치매 증상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의 기록을 넘어서, 각자가 믿는 진실을 처음으로 가족에게 또렷이 발언하게 되는 과정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작품 기획 및 시나리오 단계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사건과 대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이기에 스펙터클을 만들 수 없으므로 무엇보다 양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의 대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인물이 양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구체적 이유를 만들기 위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긴 전사를 마련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겉으로는 선형적이고 단순하게 보이나, 심층적으로는 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며 비선형적이고 미스터리한 결말로 치닫는 작품이 되기를 바랐다. 상반된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연기를 완성해준 남기애 배우와 한기장 배우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얼음에서 물이 되지 말고 공기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했어도 이를 연기해 냈을 배우라고 생각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놀라운 소설이며 개인적으로 세 번 읽은 작품이다.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처음 읽고는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다니.” 이 문장의 블랙 유머를 좋아한다.

남기애 배우는 치매 혹은 광기에 서서히 잠식당하는 인물, 주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그를 비롯해 아들 도지욱 역의 한기장 배우, 삼촌 도중명 역의 유성주 배우의 캐스팅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려달라. 이들을 캐스팅하며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도중명 역의 유성주 배우는 시나리오 초고부터 캐스팅을 결심했다. 2018년에 〈엄마는 마녀야〉라는 단편영화를 함께 만든 후로 그가 출연한 여러 연극을 보면서 이분이 규격화되지 않은 생생한 에너지들을 이성적인 틀 안에 차곡차곡 배열해 놓는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과정에 발탁된 순간부터 함께 기쁨을 나누면서 출연을 부탁했는데, 촬영 스케줄이 많은 상황임에도 반드시 출연하겠다는 약속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했다. 유성주 배우가 시나리오에 갇히지 않은 상태에서 인물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집필 중에도 지속적으로 만나 캐릭터의 전사와 가족의 속성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세 명의 주연 중 가장 적게 등장하면서도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장르의 속성을 결정짓는 도중명은 유성주 배우만이 완성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윌렘 데포의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적용시켜 보고 싶은 배우다. 남기애 배우가 연기한 주경희는 치매 증상의 발현 정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연장자지만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제일 많은 변신을 시도해야 했고 피아노 연주와 헤어, 미용 기술 등 캐릭터의 특성상 연마해야 할 요소도 많았다. 남기애 배우를 생각하면 캐스팅 과정은 희미한 과거처럼 느껴지고, 주경희가 되어가던 3개월의 준비 기간과 주경희가 된 1개월의 촬영 기간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그와의 첫 만남은 소박하고 간결했지만, 주경희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순도 높은 물질을 제조하는 과정처럼 섬세하고 치열했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구태의연한 설명이 필요 없이 주경희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느껴졌고, 간결한 대사로도 복잡한 감정과 숨겨진 전사를 전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주경희를 누구보다 깊게 연구한 남기애 배우의 대사를 채집하여 시나리오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의 경이로운 연기가 있기에, 이 영화가 치매 환자의 서사에만 갇히지 않고 운명에 저항하는 한 인간의 서사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다. 도지욱 역의 한기장 배우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 연극을 했을 때부터 극의 밝음과 극의 어두움을 스스로의 물레 안에서 기상천외하게 반죽해 자신만의 묘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던 뛰어난 배우다. 2018년에 〈바보들의 배〉라는 단편영화를 함께 만들면서 나는 한기장 배우가 가진 본질적인 에너지와 인물의 심연을 탐구하는 열정, 연기에 대한 노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복잡한 내면을 지닌 도지욱이라는 리드 캐릭터를 완성해달라고 부탁했다. 도지욱은 극 초반에는 수동적인 인물이어야 하고 중반을 넘어가면서 급격한 변신을 하는 캐릭터이기에, 풍선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서서히 바람을 불어넣는 형태의 섬세한 연기를 해야 했다. 그 괴로운 시간을 스스로 버텨내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훌륭한 연기를 완성한 한기장 배우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영화 후반부에서 발현되는 한기장 배우의 오라(aura)가 압권이다. 또한 현장에서 내가 힘들어할 때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소중한 배우다.

지욱의 삼촌이자 목사인 도중명은 복화술에 능해 설교를 복화술로 할 정도다. 이는 영화가 ‘비밀과 거짓말’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요소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복화술이란 내가 소리를 내지만 내가 아닌 대상이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속이는 연기이자 기술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도중명 역을 깊이 연구하던 유성주 배우가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복화술은 내가 소리를 내는 것을 관객도 알고 있고 내가 아닌 대상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관객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투명한 연극이라는 견해였다. 그러니 복화술은 관객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관객이 속는 척을 한다는 전제를 모두가 아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솔직한 기술이 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선문답이지만, 이것이 ‘비밀과 거짓말’을 다루는 영화 〈엄마의 왕국〉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비밀과 거짓말이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을 만드는 경우는, 비밀과 거짓이 드러나 누군가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경우가 아니다. 오히려 비밀과 거짓에 대한 양가 감정을 느낄 때, 진실과 거짓이 중첩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관계 안에서 예상치 못한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가 복화술사의 희극 연기를 보며 웃는 이유는, 이상하게도 복화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지하실 신에서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리와 빛, 그림자 등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출적으로 고민한 부분이 있다면?

김지룡 촬영감독, 김형석 음악감독, 이주석 사운드믹싱감독은 〈엄마의 왕국〉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만들어간 중요한 창작자들로 함께 지하실 신의 요소를 만들어 나갔다. 왕국 미용실 건물의 ‘반지하 집’은 인물들이 과거에 거주했던 실제 공간이며, 동시에 인물의 꿈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환상 공간이 되어야 했다. 또한 내러티브의 변화에 따라 공간의 무드가 다르게 연출돼야 했다. 이 영화는 대낮에 섬뜩한 장면이 진행되거나, 혹은 칙칙한 지하의 어둠 속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신이 많기 때문에 상반된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는 촬영, 조명, 음악, 음향의 연출이 필요했다.

김지룡 촬영감독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추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최소화된 조명만 사용하는 촬영 계획을 구성했다. 그리고 조그만 창을 통해 스며드는 빛의 밝음과 어둠의 정도를 조절해 신에 맞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데이 신의 지하실 틈으로 들어오는 산광 설정, 나이트 신의 내부로 스며드는 외부 가로등 불빛 설정 등은 각 신에 맞는 공간 인상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였다. 신의 성격과 인물의 감정에 따라 같은 공간이 다르게 보여야 했기에, 김지룡 촬영감독은 후반작업에서도 미세한 격차들을 만드는 세밀한 색보정 작업을 직접 진행했다. 김지룡 촬영감독의 독창적인 촬영 미학이 있었기에 양가적 감정들이 공존하는 숏들을 완성할 수 있었다.

김형석 음악감독은 극 전체에 흐르는 음악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통일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2014년부터 5편의 단편 작업을 함께했던 김형석 음악감독은 〈엄마의 왕국〉이 대여섯 줄의 로그라인만 있을 때부터 나와 함께 작품 연구를 했던 중요한 예술가다. 그는 첼로와 피아노를 주된 악기로 두고, 아름다운 선율이 인물의 심리에 따라서 파괴돼 가는 과정을 영화 음악으로 만들기로 했다. 공포감이 발생되는 지하 신에서는 불협화음의 첼로 연주가 과격하게 나오지만 과거 시점의 지하 신에서는 동요 분위기의 리코더 연주가 멀리서 흐르고, 마지막 지하 신에서는 오묘하게 밝은 분위기의 마림바 음악이 흐르기도 한다. 이질적인 장르의 음악들을 하나의 영화에 넣어서 독특한 흐름을 만드는 방식을 시도했고, 이는 공포감과 불안을 극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되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바흐, 가브리엘 포레, 윤이상, 펜데레츠키, 룸풀 오브 티스, 뱅 온 어 캔 어 올스타 등의 레퍼런스를 함께 들으며 영화 음악의 지향점을 찾아갔다.

이주석 사운드믹싱감독은 현재 속에서 과거를 불러내는 사운드 디자인을 정밀하게 설계했다. 후반부의 반전과 극적 변화에 사용되는 소리들은 사실 초반부와 중반부에서도 드문드문 등장한다. 일상적인 가족 드라마 장면에서도 묘한 긴장감과 불안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주석 감독과 함께 철저하게 계획한 사운드 콘티 때문이다. 인물의 행동에서 발생하는 소리, 사람이 사는 공간에서 들리는 일반적인 소리들이 이 영화 속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들리도록 이색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시도했다. 선형적 플롯을 사용하고 있으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의 감정은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이 영화에 맞게, 신 속의 주요 음향들이 다른 신에도 깊은 영향을 주도록 사운드를 설계했다. 또한 음향과 음악의 등장 시점을 내러티브상 예측할 수 있는 때에 두지 않고 변칙적으로 배치한 점도 영화의 무드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하실 장면의 편집에서 독특한 호흡을 창조한 이지운 편집감독의 능력 또한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편집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지면 분량상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겠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집과 미용실, 교회 등의 공간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주요 공간들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궁금하다.

저예산 독립영화이지만 영화의 장르와 톤 앤 매너를 결정짓는 로케이션과 프로덕션 디자인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열심히 써놓은 다양한 장면들을 삭제했고 50페이지의 짧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영화의 무대와 인물을 최소한으로 한정하고, 저예산 영화의 정형성에 갇히지 않은 프로덕션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강소랑 미술감독과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집, 미용실, 교회, 강당은 관객에게 과도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독창성을 가진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우선 ‘한국에는 이런 집이 없다, 한국에는 이런 색이 강조된 공간이 없다, 한국에서는 이런 디자인이 통용될 수 없다, 한국 독립영화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등의 편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컬러 팔레트를 과감하게 사용하기로 했고, 리얼리티와 생활감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말고 표현주의 영화의 힘을 받아들이는 미술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흔히 보아온 공간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자, 현실에도 생각보다 다채로운 색과 형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부 공간의 컬러와 어울리는 외부 공간의 로케이션들도 찾아낼 수 있었다. 영화에는 민트 계열의 색상들이 인장처럼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주경희와 도지욱의 집에서 이 색들은 도드라진 역할을 한다. 왕국 미용실은 파스텔 톤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과거의 반지하 집 신에서도 파스텔 톤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빛바랜 파스텔 톤의 색채들이 독특한 미스터리를 발생시켜 주기를 바랐다. 이와 달리 시한부 인생을 사는 도중명의 목사실은 차갑고 건조하고 텅 빈 공간으로 형상화했다. 왕국 미용실 건물 지붕의 붉은 벽돌, 대강당의 붉은 의자 등 색상으로 연결되는 숏 이미지들이 관객에게 어떤 정서와 느낌을 전달할 수 있도록 영화 속 공간을 설계했다. 장황한 대사로 내러티브를 설명하지 않고, 숏 자체의 미학적 힘과 인물의 행동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특유의 문법을 따르면서 이를 배반하는 과정도 필요했을 텐데, 장르영화 특유의 색을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시각을 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오랫동안 독자적인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스타일은 한계와 제약이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인 한계와 피할 수 없는 제약 조건들을 마주할 때, 창작자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밖에 없다. 눈물을 머금으며 기존 시나리오의 여러 시퀀스들을 과감히 삭제하고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을 선택하자, 가까스로 새로운 활로를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미스터리 스릴러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을 밝혀내려는 ‘탐정’이 있으며, 그 탐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엄마의 왕국〉도 표면적으로는 이 문법을 따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는 탐정이 비밀의 한가운데로 들어갔을 때 새로운 악당과 사건을 만나며 결투의 시퀀스가 형성되는 반면, 〈엄마의 왕국〉은 비밀 속으로 들어갈수록 주인공들이 점점 곤란해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비밀을 향해 나아가던 영상이 어느 순간 일시 정지되면서, 더 이상 재생을 못하겠다는 듯 갑자기 테이프가 뒤로 감기는 형태랄까.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라는 듯이 어느 순간 전원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며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미스터리 영화를 상상했다. 다시 볼수록 새롭게 해석되는 지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이 영화가 미스터리 장르의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족 드라마의 본능적인 감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기존 문법에서 변칙을 시도한 점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종합예술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이색적인 화학 작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에는 모성과 공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오컬트적 요소가 모두 들어가 있다.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염두에 둔 부분이 있었나.

이 영화에 의학적 자문을 주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견해에 따르면, 주양육자와 아이는 공고한 양자적 관계를 맺게 되고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된다고 한다. 아이는 주양육자가 자신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과 주양육자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인식하고 행동한다. 인지적 능력, 정서 등이 발달되어 제3자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아이는 ‘나와 주양육자’로만 이루어진 세상만을 본다. 그리고 주양육자에게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은 아이에게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쥐고 있는 주양육자가 자신이 아닌 제3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이가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가족 드라마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가족 드라마가 인간의 태생적 조건과 한계, 더 나아가 생명의 태생적 조건과 한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주양육자가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 및 애증도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인데, 이는 인간의 특성을 연구하는 강력한 드라마의 원석이 될 수 있다. 주양육자, 아이, 주양육자의 파트너 사이에서 발생하는 역학은 종종 타인들로 형성된 사회적 집단 안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동료 사이의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들의 뿌리는 어쩌면 개인이 경험하는 가족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이 가족 및 대안 가족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이 세계관은 과거의 좁은 범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시선은 과학적 합리성보다는 종교성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엄마의 왕국〉의 씨앗들이 나왔다. 수많은 종의 동식물들이 사는 지구, 수많은 인구가 사는 지구에서 오로지 ‘나와 주양육자의 관계’에서 형성된 협소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개인의 행동은, 한편으로 대단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 대단히 신비롭게 보일 수도 있다. 허구와 가상을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를 강력한 종으로 만들었다는 유발 하라리의 이론은 더 재미있는 허구를 만들고자 늘 고심하는 나 같은 이야기꾼에게는 흥미로운 소재다.

독립영화 제작 여건상 장르영화를 만드는 데 여러 어려움이 따랐을 듯하다. 작업 과정은 어땠는지? 또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모든 독립영화가 모든 순간 한계와 제약을 경험하기 때문에 당연히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현실적인 여건상 구현하지 못한 부분,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원하는 만큼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없었던 부분, 시나리오 단계 및 편집 단계에서 눈물을 머금고 삭제해야 했던 장면들이 아쉽다. 신당 세 테이크 이상 촬영할 수 없었다, 클라이맥스 신을 1시간 만에 촬영했다 등 슬픈 무용담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멈춘다. 〈엄마의 왕국〉이 소멸시킨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생한 모든 상황들이 결국 이 영화를 완성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영화를 함께 만들어준 모든 배우와 모든 스태프 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엄마의 왕국〉은 삼대에 걸친 긴 가족사를 구축한 후 해면 위로 드러난 일각에 해당하는 현재의 이야기만을 영상에 담게 된 작품이기에, 드러나지 않은 시퀀스들이 꽤 많이 설계돼 있었다. 이 영화에 담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언젠가 다른 작품 속에서 다시 발현될 것이라 믿는다.

10년 남짓의 시간 동안 여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하며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상 이야기를 기획했기에 써놓은 이야기가 꽤 있다. 나에게 어떤 기회가 올지 몰라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집필해 왔는데, 결국 선택을 받아야 제작이 가능하다. 기회가 온다면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맹렬하게 나아가는 인간 군상에 관련된 생존기를 만들고 싶다.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대초원과 망망대해를 달려보고 싶은 걸까. 〈엄마의 왕국〉을 편집하다가 〈매드 맥스〉를 보며 환호하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물론 한정된 장소 안에서 의심과 불안이 지속되는 서스펜스 이야기,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며 탄생한 독특한 크리처를 마주하는 가족 이야기, 운명에 저항하다가 오히려 운명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구조를 차용한 판타지 코미디, 시공간이 다른 사건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얽히며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만드는 퍼즐 같은 이야기도 집필해 놓았다. 무엇이 되었든 다음 영화에는 유머가 섞일 예정이다. 〈엄마의 왕국〉을 1년 동안 편집하다가 웃음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는 몇 개의 신에서는 웃고 싶다. 나도 사실 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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