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매거진』 영화가 현실을 위로하는 방법 〈힘을 낼 시간〉 남궁선 감독
2024-05-04 18:07:00

국가인권위원회 열다섯 번째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힘을 낼 시간〉에서 아이돌 인권을 다루게 된 데에는 인권위의 제안이 있었나? 초기 구상 단계가 궁금하다.

인권위에서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을 때 기획도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로 일단 하겠다고 했다. 관객으로서 인권 영화 프로젝트의 역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 감사했다. 마침 그해에 친한 동료가 일 년을 쉬며 제주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하나 만들고 싶어서 제주 배경의 부동산 미스터리를 구상하던 차였기에 그 영화를 그대로 찍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고 계산을 해보니 장르상 예산이 안 맞더라. 그래서 원점으로 돌아가 현 시대 청년들의 고민을 제주 로케이션으로 미니멀하게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이 떠올랐다.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축소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은퇴한 아이돌 출신 친구들이 처음으로 자신들끼리 제주 여행을 간다는 설정을 생각했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이돌 출신 배우가 활약해온 역사는 길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삶을 직접 조명한 건 드문 듯하다. 이들의 삶을 구체화하려면 시나리오 집필 전 사전 조사 등이 꼼꼼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었을 듯한데.

외부에서 들여다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서 곧바로 취재에 들어갔다. 공식적으로는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 많다 보니 사적으로 연을 찾아 다양한 아이돌 출신 친구들을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기자도 관계자도 팬도 아닌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경험도 과정도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적인 감정들이 있더라. 막상 직접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직감을 했다. 취재원들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들을 조합하고 직조해서 다분히 구체적이면서도 실제 이야기의 당사자들이 특정될 수 없도록 캐릭터를 구성하는 게 중요했다. 한 달 취재하고 한 달 시나리오 쓰고 한 달을 준비해서 한 달에 촬영해야 하는 일정이다 보니, 낮에 취재하고 밤에는 들은 이야기가 속상해서 울다가 아침에 글을 쓰고 다시 낮에 프로덕션 사무실에 나가는 식이었다. 개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직접적인 사건들을 다루기보다는 넌지시 우회해서 인물들의 감정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작 〈십개월의 미래〉(2021)의 ‘미래’ 최성은 배우가 이번 영화에서도 함께했다. 반짝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는 망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 수민 역할에 최성은 배우를 떠올린 까닭은? 그의 어떤 점이 수민과 만나 시너지를 낼 것이라 생각했나.

처음 영화를 구상할 땐 한국에 아이돌이나 연습생 출신 배우들이 워낙 많다 보니 리얼리티를 위해서 그런 쪽 캐스팅을 하면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것만큼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배우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연기해야 하는 감정에서부터 영화가 나오고 나서 하게 될 인터뷰까지, 이 영화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대상을 위험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캐스팅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최성은 배우가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조르더니 자기가 그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최성은이 아이돌을? 상상도 못하던 조합이었다. 〈십개월의 미래〉로 이미 독립영화의 고충을 몸소 격파한 그가 그 고생을 또 하겠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런데 수민이라는 캐릭터만 놓고 보면 ‘미래’보다 훨씬 더 최성은에 가까운 인물이다. 완벽주의, 나이에 비해 성숙한 책임감, 무심한 듯 자기 사람들을 챙기는 성격이 남들을 챙기느라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리더 수민 안에도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영화의 제작 콘셉트가 능력치 높은 소수 정예의 동료로 독립영화의 자유 안에서 시너지를 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콘셉트에 그보다 더 적합한 배우가 있을까. 최성은이 수민 역할을 주도적으로 맡으면서 연기 쪽에서도 에너지 높은 과감한 시도들이 가능해졌다. 리더 그 자체였다.

심리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사랑’ 역의 하서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상처 많은 ‘태희’ 역의 현우석 배우의 캐스팅 과정도 알려달라. 특히 하서윤 배우는 춤 솜씨가 대단해 실제 가수 출신인 줄 알았다. 이들 세 배우가 수민과 사랑, 태희의 어떤 점을 표현해주길 바랐나.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돌 출신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은 후로는 춤이나 노래 실력과 무관하게 역할만 봤다. 오디션으로 만난 하서윤 배우는 전작도 없는 신인인데도 몰입력이 대단했다. 춤은 영화 준비를 위해 단기간에 트레이닝한 것이다. 태희는 항상 웃는 아이라는 설정을 했다. 속 깊고 사람 좋은 친구들이 갖고 있는 생존 전략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전혀 단순하지 않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작은 행복을 찾는 득도 수준의 멘탈이다. 그래서 ‘무해한 웃음’을 만들어줄 수 있는 배우를 찾다 보니 현우석 배우가 보였다. 배우 자신의 해맑음이 캐릭터에 투영되어 더 복잡하고 마음이 가는 인물이 되었다.

세 사람은 학창시절 가지 못한 수학여행을 위해 제주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 이들이 제주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특히 유실물 센터 직원과 귤밭 주인이 눈에 띄었는데, 각각의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하다.

유실물 센터 직원은 사회화가 힘들어서 서울에서 고생하다가 제주에 내려와 자기 나름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인물이다. 눈치가 없어서 자꾸 선을 넘는 친구인데, 그러다 보니 어느덧 경계심 높은 세 친구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실수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침범으로 인해 해소되고 열리는 지점들이 생긴다. 영화에서는 편집되었지만, 귤밭 주인은 변호사 자격 시험에 6년째 낙방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어머니 귤밭에 돌아온 설정이다. 그 자격증 하나를 목표로 공부만 하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던 차에 귤밭에 온 아이들을 만나고 마음이 복잡해진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따뜻함을 지녔다. 세 친구가 이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그랬으면 했다.

제주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했다. 제주 촬영은 어떻게 준비했나. 또 제주 자연의 어떤 점을 강조해 담고 싶었는지도 궁금하다.

소규모 크루가 아니면 영화에 담기 어려워지는 풍경들이 있다. 올 로케이션이 쉽지는 않은데, 역설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제작 방식들이 제주에서는 열린다. 관광지로서, 촬영지로서가 아니라 좀 더 내밀하게 그곳에서 지내야만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 위주로 영화를 짰다. 시나리오에 맞추어 장소를 찾는 게 아니라 장소에 맞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이었다. 또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제주 날씨도 담아 보고 싶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촬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바람이 부는 날에 일부러 산에 오르는 신을 찍으러 나가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래섬을 배경으로 잡기도 했다. 솔직히 대단한 스태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로케이션을 가능하게 한 제작팀도 대단하고, 자연의 변수들을 파도처럼 탔던 기동성 있는 촬영팀도 대단하고, 연출팀, 미술팀, 의상분장팀, 녹음… 한 파트도 빠짐없이 대단하다. 우리는 제주라는 환경 안에 들어가려고 간 것이지 그 환경과 싸우려고 간 게 아니라는 걸 모두가 이해하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아이돌을 소재로 하다 보니 음악 역시 많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영화음악에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모임 별과 음악 작업을 했다. 큰 행운이다. 〈십개월의 미래〉에서는 영화의 톤 때문에 모임 별이라는 멋진 협업자가 있음에도 내가 음악 작업을 많이 했는데 이번 영화는 무드가 맞을 것 같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의뢰했다.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차근차근 쌓여가는 음악의 정서성으로 고립과 해소라는 키워드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돌 곡은 두 곡인데, 한 곡은 모임 별 멤버인 서현정의 「텐투텐」이라는 프로젝트 밴드의 음반에 실린 ‘페이버릿(Favorite)’이라는 곡을 편곡했고, ‘시크릿 러버(Secret Lover)’라는 곡은 내가 연출부 회의를 하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지었다. 설정상 망한 곡들이라 큰 부담은 없었다. ‘페이버릿'은 정말 좋아하는 곡이지만, ‘시크릿 러버’는 내 멋대로 경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음악감독도 스태프들도 부끄러워한다. 부끄럽게 해서 미안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시키는 거라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수민이 귤밭에서 과도하게 노동해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또한 이들에게 “더 일하라.”고 한 이들은 있어도 “그만하고 놀라.”고 한 이가 없었다는 데에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한국 청년의 고단한 삶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이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힘’이 되길 바라나.

우선은 정말 바보여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현대의 자본주의 노동 시장은 끊임없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진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노력은 노력대로 하면서 자책까지 떠안는다. 힘든 것은 그냥 힘든 것이다. 자책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든 것이 자신의 탓은 아니라는 걸 전하고 싶다. 서로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되고 의지해도 된다. 다 끌어안고 삼키는 것보다는 그 감정이라도 나누고 공감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03년 〈여섯 개의 시선〉을 시작으로 인권위 영화 프로젝트의 명맥이 오래 유지되고 있다. 이 중 하나에 참여한 소감은? 인권위와의 작업이 향후 본인의 창작 활동에 어떤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나.

〈여섯 개의 시선〉을 대학교 때 극장에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관객으로서는 상업영화 이외의 형식의 영화를 처음으로 접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었다. 감독들이 액티비스트가 아니라 아티스트로서 참여하게 된다는 점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흥미로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에서 다루는 어떤 주제라도 포괄적으로는 인권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권위에서 진행하는 인권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배우는 점들이 많았다. 시야가 확장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창작 활동의 책임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떤 사회적 상황을 조명하기 위해 만든 작업이 의도와는 달리 역으로 당사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상황이 있겠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좋은 수업을 마친 기분이다.

과거에 비해 여성 창작자, 여성 서사가 늘었지만 여전히 여성 감독이 두 번째, 세 번째 장편 연출을 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감독 남궁선이 하고 싶은 다음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워낙 많고 시시각각 변한다. 수년 전에는 생존과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를, 얼마 전에는 자본주의적 불안에 대한 이야기들을 장르로 풀고 싶었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첨예하고 조심스러운 주제를 연달아 만든 내 마음 상태도 있겠지만, 전쟁을 비롯해 세상에 끔찍한 일들을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오히려 잠시 잊고 있던 즐거움이나 안식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다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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