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세계적인 거장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10편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차이밍량 감독의 인연은 2001년 그의 첫 번째 디지털 단편 영화이자 디지털삼인삼색의 한 편인 〈신과의 대화〉(2001)에서 시작됐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 표현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를 지지해왔기에, 혁신의 상징과도 같은 차이밍량 감독을 영화제의 역사와 다시 연결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TV, 영화, 공연, 미술 등 장르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높은 수준의 예술을 창작해 온 거장을 ‘영화감독’으로 한정해 소개하는 것이 그의 세계를 좁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영화감독이라 고집하고 싶은 것은 그는 ‘움직이는 시간의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2013년 그는 더 이상 상업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발표한 후 지난 십여 년간 행자가 주인공인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행자 연작’은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 배우 이강생이 맨발로 느리게 걷는 영화들의 모음이다. 2012년 〈무색 無色〉에서 시작된 ‘행자 연작’은 같은 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발표된 〈행자 行者〉로 이어졌고, 202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열 번째 작품 〈무소주 無所住〉까지 그 긴 여정을 이어오고 있다.
열 편의 영화는 중국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삼장법사가 여행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가지러 서역으로 떠나고 온갖 고난을 겪은 후 마침내 불경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기차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 삼장법사가 두 발로 걸어서 사막을 건너야 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행자의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이강생 배우가 분한 영화 속 승려는 현대의 지구를 맨발로 느리게 걷는다. 그 여정은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대만 북부 주앙웨이, 파리, 마르세유, 도쿄를 거쳐 워싱턴 DC까지 이르러 우리에게 사색과 깨달음의 시간을 선사한다.
한 편의 움직이는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이 영화들은 차이밍량 감독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그림이나 조각을 보듯 영화를 볼 수는 없을까, 나는 스케치를 하듯 영화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스토리텔링에 한정되지 않는 이미지의 예술임을 입증하는 행자 연작은 미학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서 영화가 현실을 반영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천천히 긴 시간을 들여 스크린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세상을 보게 한다. 아무 사건도 없이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걷기만 하는 행자의 느린 발걸음은 순수한 반복이 만들어 내는 물성으로 우리의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다. 감독은 관객에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스스로와 세상에 관한 사유로 들어가는 아름답고 우아한 길을 냈다. 현실의 완전한 미적 환영 속에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차이밍량이 하는 영화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일이다.
프로그래머 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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