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프로그램 ‘필립 그랑드리외: 영화언어의 재발견’을 통해 소개되는 필립 그랑드리외의 8편의 노작은 급진적인 이미지 탐험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랑드리외의 영화가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전통적인 서사영화의 유습을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음지>(1998)의 오프닝은 폭력적인 인형극을 보면서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엔딩은 ‘투르 드 프랑스’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두 장면의 맥락은 어떤 형식으로든 설명되지 않는다. <새로운 삶>(2002)의 도입 시퀀스는 맹렬하게 도끼질을 해대는 주인공 알렉시의 모습을 길게 찍는다. 인물에 밀착한 카메라는 날카롭게 육체를 잘라내면서 팽팽한 긴장을 불어넣는다. <음지>의 연쇄살인자 장, <새로운 삶>의 소외된 미국인 병사, <밤임에도 불구하고>(2016)의 자기 파괴적인 주인공들은 그들의 됨됨이나 심리적 동기, 의미를 추론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세계 안에는 어떤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랑드리외가 서사의 논리를 등한시하는 바탕에는 ‘재현의 시네마’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간단한 구조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미스터리한 측면을 강조하면서 시각언어의 급진적인 조형을 통해 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는 시각적 비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대신 모든 숏은 강력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긴장을 유발한다. 이미지 세공술은 따라서 매우 정교하다. <호수>(2008)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2011) <화이트 에필렙시>(2012) <위협>(2015) 등에서 감독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든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비전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독창적인 룩이나 비전, 사물을 보는 방식, 대담한 감각의 모험은 이미지의 왜곡과 떨림, 깜빡임, 빛과 포커스의 조작, 프레임 안과 바깥의 활용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랑드리외의 영화에서는 급진적인 사운드 운용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대사는 최소화되고, 음악은 앰비언스 효과를 일으키면서 과장, 왜곡, 강조된다. 불안을 가중시키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세계와 화합할 수 없는 이들의 격정적인 삶을 표현한다. 단일하고, 연속적인 숏 안에서조차 일률적이지 않은 떨림, 이미지를 휘감는 노이즈와 다층으로 설계된 사운드, 거대한 박동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형식적인 선택 또는 스토리,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구상된 이미지 언어는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의미를 가진다. 같은 아이디어나 같은 감정을 곱씹지 않으면서 시네마의 새로운 감각을 탐구한다.
육체와 언어의 탐구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비관적이고 어두운 비전 때문에 필립 그랑드리외에게는 ‘악동’의 이미지가 씌워졌다. 그가 사회적 질서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의 갭을 통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여기서 부상하는 것이 ‘육체’이다. 그랑드리외는 극소량의 빛 아래서 추상적인 육체와 얼굴, 표정을 찍는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우리는 현존하는 육체와 감정을 보게 된다. 이같은 맥락에서 그랑드리외는 브루노 뒤몽이나 가스파 노에, 장 클로드 브리소, 미하엘 하네케 등과 함께 섹스와 폭력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뉴 프렌치 익스트리미즘’의 조류로 범주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주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어둡다. 표현에 있어서 극단주의를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면 제각각의 방식으로 육체를 다룬다는 것이다.
필립 그랑드리외는 육체와 그 동력이 영화적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는 세계에 대한 놀랄 만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헐벗은 육체의 이미지는 물질로서의 육체를 벗어나 보여주기의 형식, 재현의 대상으로만 의미를 가진다. <새로운 삶>은 어딘지 알 수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 오로지 인물들의 육체만을 가지고 진행되는 영화다. <화이트 에필렙시>와 <위협>에서 육체는 ‘대상성’을 상실하고 추상화된다. 두 영화에서 육체는 변형되어가고, 뭉개지며, 어둠(밤) 속으로 사라지고, 거대한 형상으로 다시 나타나며, 과장된 톤으로 덧칠된다.
필립 그랑드리외는 영화가 인간심리에 대한 설명이나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관념을 공격한다. 대신 관객이 육체적으로 반응하는 영화를 찍는다. ‘헐벗은 삶’을 주제로 한 <화이트 에필렙시>와 <위협>에서, 그리고 <밤임에도 불구하고>에서 육체의 움직임은 이미지가 수행하는 모든 기능의 중심이다. 섹스를 다루면서도 에로틱하지 않은 이 영화의 장면들에는 다분히 스너프(snuff)적인 요소가 있다. 카메라는 가련하게 학대당하는 육체를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행위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 대해 코멘트한다. 사창가에서 소녀를 학대하는 미군 병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새로운 삶>은 폭넓게 확장된 그랑드리외의 시각적인 비전을 형상화한다. 항문성교를 하며 여자를 학대하는 장면에서 그랑드리외는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 다채로운 시각적 스타일을 구사한다. 페이드와 과다노출을 사용한 이 장면에서 남자는 어둠에서 밝음으로 이행한다. 춤을 추는 여자는 프레임에 조금만 걸쳐 있다. 여자의 얼굴 중심에는 어둠이 어린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는 하나의 ‘풍경’처럼 다루어진다. 인간은 풍경 속에 놓인 형상, 또는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 순간 ‘영화’는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 된다.
장병원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