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경험이 만드는 연기_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박정민
<동주>(2016)의 송몽규에게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박정민은 젊고 실력 있는 갤러리 관장 박재범이 되어야 했다.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의 재범은 상업적 논리가 아닌 자신의 논리를 따르는 화상(畵商)이다. “좋은 작품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 그는 주류 미술계에 아무 연줄도 없는 젊은 작가 지젤(류현경)을 발굴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죽음과 소생으로 혼란에 빠진다. 처음 만난 지젤에게 반말을 하는 등 재범은 까칠한 구석이 많은 인물인데, 그것은 박정민이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예술가병에 걸렸던 스무살 무렵 미술관을 즐겨 찾았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웃긴 거다. 스무살짜리 꼬마애가 힙합 바지 입고 들어오니까 안내도 안 해주고 무시하고. (웃음) ‘박정민이란 사람이 갤러리 관장이라면 어떨까’ 생각하며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조금은 예민하고,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정민은 스스로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모방에서 오는 창조가 필요한 배우”라 말했다. 창조적 모방을 위해서는 주의 깊은 관찰과 체험이 필요하다. <동주>를 준비하던 때 사비로 북간도 용정에 있는 송몽규 생가를 방문했던 것처럼.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를 준비하면서 든 아쉬움은 캐릭터로 살아보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미술관에 가서 사람들과 얘기도 나눠보고 관찰도 깊게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완벽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생산적 감정이 아닐까. 박정민은 요즘 5월 말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
<안투라지 코리아> 준비와 곧 출간할 책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경험치를 확장하려는 이런 태도가 그의 연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숨은 비결!
글 이주현·사진 박종덕 객원기자
상호작용이 주는 에너지_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류현경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지젤. 동명 발레 속 주인공의 이름이 아니다. 지젤은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에서 류현경이 연기한 오인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인숙은 결정적 순간에 여러 차례 죽었다 되살아나며 상황을 뒤엎어 버리는 여자다. 유명세와 예술적 진가 사이에서 고민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오인숙의 본질적인 고민은 배우 류현경의 고민과도 연결됐다. 배우로서 그는 ‘있어보이게’ 행동해야 한다는 외부의 압박에 종종 시달렸다고 했다. “어느새 남들의 기준에 맞춰가려 하는 내가 보이더라. 잠깐 미쳤던 거지. 예전에 이탈리아에 갔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종업원의 꿈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동생과 바를 차려서 이것저것 하는 게 꿈이라더라. 알고 보니 그 사람의 진짜 직업은 배우였다. ‘내가 꼭 어떤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그 때 생각했다. 야망 따위 평생 가봐야 생기지도 않을 건데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웃음).”
부와 명예를 과감히 포기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작품을 걸고자 한 화가의 결단도 저 좋을대로 만들어 온 류현경의 분방한, 그러면서도 배우의 일관적인 욕망이 엿보이는 필모그래피와 자연스레 맞닿는다. 현재 진행 중인 연극 <올모스트 메인>도 그런 이유로 시작했다. “연기할 때의 상호작용의 힘을 새삼 느꼈다. 관객도 관객인데 같이 하는 다른 배우들에게서도 무척 에너지를 얻고 있다.” 연기 경력이 십수년도 더 된 베테랑인데도 “무대 위에선 초보”라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고. “몸은 영화제에 와 있는데 숙소에 돌아가면 <올모스트 메인> 대사를 한 번 이상은 외우고 자야 마음이 놓인다. 너무 좋으면 떨려서 제대로 못하게 되는 게 있잖나. 좋아하는 마음을 이길 정도의 연기를 해내야 하는데 말이다.” 지젤의 그림처럼, 더 많은 사람의 눈이 닿는 곳에 류현경의 좋은 에너지가 뻗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글 윤혜지·사진 박종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