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가 쓴 각본으로 페데리코 펠리니가 찍은 영화 같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2013)에 대한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의 감상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14년이 소요된 <신이 되기는 어렵다>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영화 세계로부터 나오는 문이자 다시 처음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의 원작자이기도 하다)의 SF소설을 원안으로 한 게르만의 유작은 하나의 독자적인 우주를 형성한다. 게르만은 역사와 신화, 종교, 이데올로기의 심부(深部)를 꿰뚫는 통찰로, 가공할만한 일탈적 상상력으로, 정형화하기 힘든 어휘와 리듬을 유장하게 휘몰아쳐서 장엄하게 종지부를 찍는다.
알렉세이 게르만은 러시아 영화사에서 가장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이다. 40여 년 동안 단 6편의 영화만 찍었으나 이들 안에는 작가의 독창성을 가늠하는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게르만의 영화는 소비에트의 예술 창작 강령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율에 정면으로 맞서보고자 한 산물들이다. 따라서 페레스트로이카나 사회주의의 종식이 게르만을 자극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르만의 영화는 가공의 시간으로부터 당도한 것 같은 전언, 현실과 환상의 착종, 풍만한 비유와 은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파편화된 내러티브, 상당한 수위의 잔혹 이미지로 요약된다.
모든 영화가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보이스 오버는 빠르게 사라진다. 서사는 시대에 관한 배경 지식, 세팅에 의존하지 않고 직관에 따라 흘러간다. 시공이나 선악, 피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카오스의 세계는 대개 선명한 흑백 필름으로 찍혔고 시간의 퇴적을 웅변하듯 거칠고 묵직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반(反) 영웅이 아니라 비(非) 영웅을 그리다
1998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게르만의 다섯 번째 영화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1998)는 파문을 일으켰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화술에 심사위원들은 당황했고 비난을 쏟아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마틴 스콜세지는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는 황금종려상감이지만 나도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심사위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냉전이 한창인 1953년 모스크바에서 3일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소비에트 인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심지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독재자 스탈린은 죽어 가고 있다. 전통적인 극작법을 파괴하는 어지러운 사건의 연쇄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 영화의 예사롭지 않은 기운은 흑백 이미지의 복잡한 미장센과 사운드의 시청각적인 하모니이다.
게르만의 영화는 형식과 내용, 테마, 세계관 등 모든 차원에서 급진적이다. 러시아 제국의 몰락기나 스탈린의 권력이 공고해지는 1930년대 철권 통치기 등 예민한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한 그의 영화는 구(舊) 체제 하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대다수의 작품이 상영금지를 당했고 관료적 장애를 청산한 1990년대 글라드노스트의 물결을 타고 해금되었다. 그리고리 아로노프와 공동연출로 만든 장편 데뷔작 <일곱 번째 동지>(1968)는 러시아 내전 당시 좌파가 주도한 적색 테러를 소재로 한 이야기였고, <길 위에서의 심판>(1971)에서는 붉은 군대와 나치를 한 궤도에 놓음으로써 게르만이 겪게 될 가시밭길의 시발점이 된 영화였다. 아버지 유리 게르만의 소설을 원안으로 한 <나의 친구 이반 라프신>(1984) 역시 러시아 영화의 표준적인 스타일을 완연히 벗어나 있었다. 내러티브보다 분위기에 의존하는 이 영화는 말소당한 시대에 대한 재구성을 통해 볼셰비키의 이상주의를 한낱 미몽으로 전락시킨다. <전쟁없는 20일>(1977)은 전쟁의 의미도, 영웅의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노스탤지어 드라마이다.
게르만의 영화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체의 관습에 저항하는 우상파괴주의적인 화술을 구사한다. 하나의 예를 보자. 컬러로 시작하여 긴 페이드를 거쳐 흑백으로 변하는 도입부로 열리는 <나의 친구 이반 라프신>은 시종 흑백과 컬러를 오간다. 그 단어의 진짜 의미에 비추어 봤을 때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게르만은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 전경과 후경, 메인 플롯과 서브플롯의 위계를 파괴하면서 종종 스타 배우보다 이름 없는 엑스트라를 더 중요하게 다룬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만의 인물들은 반(反) 영웅이 아니라 비(非) 영웅에 가깝다.
<길 위에서의 심판>에 출연한 아나톨리 솔로니친(타르코프스키가 편애했던 배우이다)은 1960년~70년 사이 소비에트 전쟁영화에 빈발했던 남성 영웅의 풍모를 초라하게 변형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전쟁없는 20일>에 스크루볼 코미디 배우 유리 니쿨린을 캐스팅하여 심각한 연기를 하게 한 것도 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권위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탈주의 작가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의미망은 게르만 영화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추정해볼만한 특징은 플롯의 소거이다. <길 위에서의 심판>에서부터 게르만은 서사를 작은 삽화들, 외견상 불필요해 보이는 세목들로 쪼갰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스토리 라인은 급전을 일으킨다. 한편 <전쟁없는 20일>에서는 복잡한 서사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 기이한 전쟁영화에서 액션은 의미심장한 전쟁의 부재로만 전경화 된다. 병적인 완벽주의를 가지고 생애 대부분을 드러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게르만은 권위에 투항하기를 거부했다. 후반작업 도중 끝을 보지 못하고 아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에 의해 완성된 <신이 되기는 어렵다>의 영웅은 돈키호테와 란슬롯을 합쳐놓은 것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게르만 자신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허황되다고밖에 말하기 어려운 안티 서사의 언어와 세계에 깊숙이 빠져든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는 끝까지 그가 낡고 견고한 관습과 싸웠다는 입증이다. 게르만은 권위를 능욕하는 탈주의 작가이다. 그 위태로운 전장에서 타협하지 않고 싸우다가 조용히, 장렬히 산화한 한 반골 예술가의 족적이 이 전작 회고전이 기리는 바이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