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8일 <비구니> 부분 복원판 상영이 끝난 뒤 진행된 대담에서 “완성된 영화를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안타깝다”고 아쉬워하셨는데.
그날 부분 복원판을 보니 더 아쉬웠다. 33여년전, 김지미씨가 삭발한 것만으로도 큰 이슈가 됐었다. 당시 어떤 여배우가 삭발할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김지미씨 뿐만 아니라 모두의 노력이 들어간 작품이었다. 제대로 완성됐다면 칸국제영화제를 포함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널리 알렸을 것이다.
옛날 얘기를 여쭙고 싶다. 1970년 시나리오 <흑조>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가 경력을 시작하셨다. 소설이나 시가 아닌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뭔가.
용돈을 벌기 위해서. 군대를 다녀온 뒤 백수로 지냈던 때라 별 생각 없이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시나리오 고료가 상당히 높았다(웃음).
당시는 지금처럼 시나리오를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 없지 않았나.
아침에 극장에 가서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 동시상영관이었던 까닭에 두 편을 연달아 봤다. 보다가 졸리면 자고, 일어나면 다른 영화가 상영되고 있어 두 편의 줄거리가 뒤죽박죽 섞이기도 했다(웃음).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영화언어와 서사 구조를 익혔던 거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고 해서 곧바로 제작자나 감독들로부터 연락이 온 게 아니었다고.
그때가 30대였는데,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건 다 받아서 치열하게 썼다. 생존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를 계속 쓰려면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임권택 감독은 언제 처음 만났나.
전방의 탱크 부대에서 폭발 사건이 있었다. 한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리고 자신은 전사했다. 한 제작자가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국책영화를 기획하려고 임 감독과 나를 부르면서 만나게 됐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인생의 분기점이 된 작품이 <짝코>였다고 말씀하셨는데.
한국전쟁 때 좌파와 우파가 혼재된 상황에서 살아가던 두 남자를 그려낸 이야기이지 않나. 나도, 임 감독님도 비슷한 가정사를 공유하고 있었다. 7, 8페이지 가량 되는 시놉시스를 임권택 감독님께 제안을 하면서 의기투합하게 됐고, 이념에 희생당한 인간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만다라>를 일생의 역작으로 꼽으신 바 있다. 여관방에 들어가 나흘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써내려간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김성동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임 감독님과 상의한 방향으로 각색해야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었지. 당시 조감독이었던 고 곽지균 감독이 여관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본이 나오면 인쇄업체에 가서 책(시나리오) 제작을 맡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만다라>는 지산(전무송)과 법운(안성기) 두 젊은이가 자기완성의 꼭지점을 향해 가는 길을 그린 이야기다. <만다라>가 소승적 차원에서 개인의 고행을 담았다면, <비구니>는 대승적 수행의 길을 그린 작품이다.
이번 전주에서 상영되지 않은 작품 중에서도 상영이 되었으면 하는 작품이 있나.
굳이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누가 이 아픔을>(1979, 감독 설태호)이다. 이 작품 또한 반공영화로 기획된 작품인데, 반공적인 색채를 빼면 매우 아
름다운 영화다.
젊은 작가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린다.
시나리오는 발과 가슴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머리로만 쓰는 시나리오가 많다.
글 김성훈·사진 박종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