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바벨>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바벨>은 어떤 기획으로 시작됐나?
자서전과 같은 작업인데, 1983년에 촬영을 시작해서 지난해에 마쳤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시리즈가 8개 정도 되는데, 전체 분량
을 다 합치면 20-30시간이다. ‘영화 일기’처럼 구성했다. 영화 속에는 실제 친구들과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그들 자신으로 출연한다. 전문 배
우도 없고, 모두 실제 인물이다. 그냥 자기 역할 하는 거다. 결국 내 목소리와 몸이 등장하는 영화다. 30년 동안 내 몸이 어떻게 변화하고 늙어 가
는지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장례식을 치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장례식은 한 작품의 결론 부분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거다. 나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보리스 레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인물인 보리스 레만의 마지막을 그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진실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다 허구다. 주제 자체는 비극적이지만, 아마추어 영화처럼 심각하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에릭 로메르는 아마추어 작업의 미덕을 단순함이라 말했다. 감독님에게 아마추어리즘은 어떤 의미인가?
단순함이라는 개념이 나도 마음에 든다. 다른 말로 하면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거다.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처럼. 촬영할 때 나는 테이크를 여러 번 진행하지 않는다. 1~2번 정도가 전부이고, 미리 준비하고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한다. 출연자가 영화인이 아니라서 다시 촬영할 수도 없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늘 영화를 찍고 있다.
첫 장면이 물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개가 반갑게 당신을 찾는데, 영화 후반에 당신이 개에 대한 트라우마를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맞다. 오랜 여행 끝에 돌아왔을 때 날 알아본 존재가 개하고 장님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내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디테일이다. 그런 디테일이 여러 곳에 있다.
책이나 필름을 불태우는 장면에서의 불의 이미지는 물과 대조적이다. 앙리 링글루아가 “예술은 불과 같아서 재에서 다시 소생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를 불사조란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개 끄덕이며) 제대로 보신 것 같다. 나는 <두사람, 시선, 위치(물과 불의 결혼식)>(1983)이란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물을 상징하고, 여자는 불을 상징한다. 연금술에 관한 영화다.
당신에게 물의 이미지가 왜 중요한가.
내가 호수 근처에서 태어났고, 물고기자리기도 하다. 어떤 영화를 시작하려는 동기를 물에서 많이 얻는다. 그렇다고 자연을 찍는, 자연주의 작가는 아니다. 집도 중심가에 있고, 도시적인 영화인이다. 다만 영화를 찍을 때 많이 걷는다. 차 운전도 못한다. 걸어 다니는 보행자의 이미지가 내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보시면 된다. 영화를 이해하는 데도 이런 개념이 중요하다. 피곤하면 쉬기도 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고, 보행자의 리듬과 같은 리듬으로 영화를 만든다. 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이나 에릭 로메르와 가까운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대여섯 편 정도를 봤다. 단순하면서도 변주곡처럼 다양하게 반복되는 작품들이다. 오즈 야스지로나 에릭 로메르 같기도 하다. 유머도 있고. 홍상수 감독은 영화에 출연 안 하신다던 가? 잘하실 것 같은데 (웃음).
글 김성욱 영화평론가·사진 최성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