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수석프로그래머
<화장실의 피에타 Pieta in the Toilet> | 마츠나가 다이시 | 일본 | 120분 | 국제경쟁
나른하고 우울한 공기에 가득찬 도쿄의 일상을 뚫고 한 미대 출신 청년이 내지르는 마지막 예술적 사자후를 그린 작품. 거창한 구원의 구호를 내걸지 않더라도 그저 살아 있었다는 표식으로의 예술. 전반적으로 침체된 느낌을 주는 일본 독립영화의 흐름에서 빠져나와 여하튼 누군가는 내지르는 패기로 영화를 만들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
<바느질 위의 인생 A Stitch of Life> | 미시마 유키코 | 일본 | 104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고집스럽게 재봉틀을 돌리며 의상을 만드는 여성의 이야기. 의외로 단아하고 고전적인 품격이 느껴지는 연출 호흡으로 고리타분한 여주인공의 장인정신을 이해하게 만든다. 주연을 맡은 나카타니 미키의 매력이 여전히 돋보인다.
<프리다 칼로의 유품 The Legacy of Frida Kahlo> | 고타니 다다스케 | 일본 | 89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예술가의 유품은 예술가의 작품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프리다 칼로의 유품을 찍는 사진전작업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가 사물을 찍으면 영화 카메라는 그 모습을 담는다. 주변사람들의 증언이 채집되고 선배 예술가를 찍는 후배 예술가의 해석이 덧붙여지며 우리는 특정 예술가의 작품해석은 그의 유품을 통해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배우는 오늘도 The Running Actress> | 문소리 | 한국 | 24분 | 코리아 시네마스케이프 단편
배우 문소리는 자신의 직업을 소재로 한 이 단편영화에서 영화감독으로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보편성과 개별성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아우르며 용기 있게 찍어낸 유머와 풍자와 자기성찰의 면면들은 충분히 재미있으며 곱씹어볼만한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 문소리 그녀의 연기매력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Waiting for the Snow> | 장희철 | 한국 | 99분 | 한국경쟁
절망을 권태로 포장하는 여고생과 마냥 낙천적인 장애인의 우연한 조우를 정감 있게 찍어낸 영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삶의 면면을 귀엽게 보여준다. 서로 상관없을 듯한 개별적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다가 살포시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솜씨도 호감을 준다.
이상용 프로그래머
<마태 수난곡 스토리 Erbarme dich: Matthaus Passion Stories> | 라몬 힐링 | 네덜란드 | 99분 | 시네마페스트
라몬 힐링은 다큐멘터리를 포함하여 실험영화와 극영화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온 네덜란드의 작가이다. 이번에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둘러싼 여러 조각들을 맞춰내면서 바로크 음악의 화성학적 조화와 영화의 형식적 조화 그리고 인생 드라마의 조화로움을 연출해 내고 있다.
<하루 속의 일 년 12 Months in 1 Day> | 마곳 스하프 | 네덜란드 | 74분 | 국제경쟁
제작진들은 매달 하루씩 모여 영화를 작업해 갔다. 그리고 영화를 촬영하지 않는 한달의 기간 동안은 촬영본 내용을 근간으로 자유롭게 확장시켰다. 애초부터 결론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프로젝트였다. 이러한 즉흥성과 자율성이 영화에 독특한 리듬을 부여하면서 영화는 인물들을 따라 점점 더 풍성해지는 사연들을 전해주고 있다. 실험적 시도와 배우들의 긴장감이 눈을 사로잡는 영화.
<하늘 아래 우리는 The Sky Above Us> | 마리뉘스 흐루토프 | 세르비아, 네덜란드 | 97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1999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나토는 78일간의 대규모 폭격을 감행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폭격의 상황에서 안나와 슬로바 그리고 보얀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힘쓴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린다. 영화는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공포와 생존의 방식들을 보여준다. 동유럽의 비극을 보기 드물게 인상적으로 풀어낸 영화.
<인 더 크로스윈드 In the Crosswind> | 마르티 헬데 | 에스토니아 | 87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에르나는 어린 딸을 둔 어머니다. 여인 에르나가 딸과 함께 시베리아를 견딘 시절에 관한 회상과 비극에 관한 영화. 러시아 점령기 때 에스토니아에서 일어났던 비극적 사건을 바탕으로 스틸 이미지의 화면 구성과 숨 막히게 아름다운 흑백의 영상으로 역사를 담아낸다.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마음에 새겨지는 최근 에스토니아 영화의 다채로움을 대변하는 작품.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 Eisenstein in Guanajuato> | 피터 그리너웨이 | 네덜란드, 멕시코, 벨기에 | 105분 | 시네마톨로지
말이 필요 없는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인생 중후반전을 다룬 영화. 할리우드에서 영화작업의 시도가 좌절된 이후 그는 1931년에 멕시코의 과나후아토로 간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에 눈을 뜨고, 예술에 대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은 특유의 평면적인 실내 공간이 지닌 건조한 느낌과 코믹하면서도 광기어린 에이젠슈타인의 캐릭터를 대비시키면서 입체적인 예술가의 초상을 제시한다.
장병원 프로그래머
<자상 Navajazo> | 리카르도 실바 | 멕시코 | 75분 | 국제경쟁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 티후아나를 무대로 한 <자상>은 종말이 임박한 세계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리카르도 실바의 이 놀라운 데뷔작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푼돈을 걸고 스트리트 파이팅을 하는 남자들, 포르노 여배우를 인터뷰하다 실제 포르노를 찍는 미국인 감독, 마약에 중독된 정키 커플 등 절망과 낙담, 삶의 희망이 기이하게 교차한다. 면도칼로 베어낸 듯 예리하게 그려낸 현대 멕시코 묵시록.
<세컨 찬스 A Second Chance> | 수사네 비르 | 덴마크 | 102분 | 시네마페스트
<인 어 베러 월드>(2010)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2012)로 알려진 스웨덴 감독 수사네 비르의 신작.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아내로 인해 아이를 잃은 베테랑 형사 안드레스가 도덕적 시험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다. 스릴러적인 분위기로 진행되던 영화는 안드레스의 결단을 축으로 인류애적인 휴먼 드라마로 변모한다. 감정의 몰입을 유도하는 스토리와 농밀한 심리묘사가 시종일관 강력한 흡입력을 유발한다.
<스트라토스 Stratos> | 야니스 에코노미데스 | 그리스, 독일, 키프로스 | 137분 | 몰락한 신화: 그리스 뉴웨이브의 혁신
낮에는 빵공장 노동자로, 밤에는 청부살인 킬러로 극적인 이중생활을 하는 중년남자 스트라토스의 이야기. 동시대 그리스를 은유하는 타락한 세상에서 신념을 지키려는 스트라토스의 일상이 건조한 스타일로 묘사된다. 그리스의 대배우 반젤리스 모우리키스가 금욕적인 킬러 스트라토스를 압도적으로 묘사한다.
<더 라스트 해머 블로우 The Last Hammer Blow> | 알릭스 드라포 | 프랑스 | 83분 | 시네마페스트
중병을 앓는 엄마를 모시고 사는 소년 빅터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생부와 음악을 통해 교감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가족드라마. 사춘기 소년의 성장 스토리 안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이 몽펠리에 지역의 풍경, 결손가정 소년의 스산한 내면과 공명을 이룬다.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소년 배우 로맹 폴은 대사보다 몸짓과 제스처로 과묵한 소년의 심리를 훌륭하게 표현한다.
<자연사 박물관 natural history> | 제임스 베닝 | 오스트리아 | 77분 | 익스팬디드 시네마
실험영화 작가 제임스 베닝과 오스트리아 자연사 박물관의 합작 프로젝트. 고적한 박물관 내부 공간들과 박제된 동물들의 영상이 교차하면서 삶과 죽음, 정지와 움직임, 침묵과 고요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제임스 베닝의 영화답게 하염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 화면은 무심코 지나치는 공간과 사물에 새로운 인상을 부여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박물관의 곳곳을 탐사하는 시적인 작품.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