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영화의 새로운 창시자로 불리는 마르틴 레흐만의 영화는 고유의 리듬감으로 미묘한 불화, 진부한 일상성, 지적인 유머를 담아냈다고 평가된다. 정치색이 짙었던 브라질 ‘시네마 노보(Cinema Novo)’ 세대와 달리, 레흐만의 ‘누보 시네 아르헨 티나(Nuevo Cine Argentina)’는 동시대적 경험에 대한 미니멀리즘적 감성을 차가운 관찰자적 기법으로 재현하는 것이 특징 이다. 그는 미국 고전 스크루볼 코미디의 변주라 할 만한 위트 있는 현대적 코미디(droll contempo comedy)를 활용하여 공 허하고 무미건조한 대화를 통해 현대사회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의 장편 데뷔작 <라파도>(1992)는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아르헨티나 영화비평가협회의 최우수 신인작품상을 수상했다. 오토바이와 돈을 강탈당한 청소년 루시오의 행적을 따라가는 작품으로 군사독재 시절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배경으 로 하고 있다. 레흐만의 기원이 되는 이 영화는 1950년대 네오리얼리즘 기법을 연상시킨다고 평가받았다. 1999년 낭트영화제 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두 번째 장편영화 <실비아 프리에토>(1999)는 마리화나를 끊고 의욕적인 새 삶을 살고자 하는 20 대 카페 여점원 실비아의 일상을 묘사한다. <요술장갑>(2003)은 레흐만의 무미건조한 코미디 양식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다. 영 화에서 아르헨티나의 경제 불황은 이례적인 한파로 비유되는데, 피라냐의 제안으로 인해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자동차를 팔 아 투자를 한 알레한드로는 경제적 전락의 씁쓸한 연쇄를 경험하게 된다. 인물과 상황이 점차적으로 증가하며 구조적인 형식 을 갖춰나가게 되는 이 작품은 우울증과 경제적 파산이 서글픈 일상이 된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코파카바나>(2006)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내에서 극빈층을 이루는 볼리비아 이주민 커뮤니티와 이들의 민속축제 를 조명하는 작품이며, TV영화로 제작된 <배우 입문 교육>(2009)은 실험적인 아역 연기 워크샵을 진행하는 세르지오의 이야 기를 다루는 풍자극이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적 터치를 보여주던 전반기 영화는 점차 로베르 브레송을 상기시 키는 엄밀한 형식주의로 기울어가는 듯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최근작 <발사된 두 개 의 총알>(2014)은 견고한 영화 형식과 유연하면서도 우발적인 리듬감이 절정에 달한 영화다. 소년 마리아노는 집 창고에서 총을 발견하고는 우발적으로 자신의 머리와 배 에 두 발의 총알을 쏘지만 별 탈 없이 살아남는다. 이후 일상은 권태롭게 이어지지만 어딘가 불가사의하게 일그러진다. 현실은 붕괴되지 않고 그저 불안감을 내장한 채 무료하게 이어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현실에 대한 감독의 능란한 영화적 포착이다. 마르틴 레흐만은 소설가이기도 한데 <라파도> <실비아 프리에토> <배우 입문 교육> 은 그의 소설에서 발단이 된 작품들이다. 현실을 관찰하는 영화, 현실을 변형하는 영 화, 현실에 참여하는 영화를 분류할 수 있다면 코미디에서 시작된 마르틴 레흐만의 영화는 궁극적으로 현실을 관찰하는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발사된 두 개의 총 알>은 집요하게 고정 카메라 샷을 활용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완강한 관찰의 태도를 견지하는 영화적 태도가 극에 달한 영화로, 차세대 영화거장으로 발돋움하는 레흐만 의 두 번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송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