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통해서만 가능한 여성의 초상
: 실험의 형태, 예술가의 초상: 인디펜던트우먼 특별전
올해 전주영화제는 ‘스페셜 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 섹션을 통해 쓰이지 않은 방식의 영화사적 계보 그리기를 시도한다. 7명의 감독, 15편의 여성감독의 다큐멘터리, 픽션, 실험을 아우르는 기획전으로 기록에 관해 기록하고, 기록하기를 사유하는 작품을 모았다. <워터멜론 우먼>(1996)과 <금발머리 부부>(2003)를 제외하면 대부분 60, 70년대 제작된 작품이다. 그러므로 왜 이 두 영화가 (비교적) ‘최근’을 대표하는 자리에 놓여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두 영화는 다큐멘터리(<금발머리 부부>) 혹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가진 극영화(<워터멜론 우먼>)로 잊히거나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찾는 과정이 담긴다. <금발머리 부부>에서 감독 알베르티나 카리는 어린 시절 실종된 자신의 부모가 누구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찾으려 한다. <워터멜론 우먼>의 감독 셰릴 두녜이는 한 인물에 관한 허구적 상을 조각한다. ‘워터멜론 우먼’이라고 불렸던 흑인 여성배우는 백인 주인공의 가정부 역할을 주로 하던 레즈비언 여성이다. ‘워터멜론 우먼’은 허구의 존재이지만 존재의 맥락은 허구가 아니다. 대부분의 흑인 여성배우들은 정형화된 역할로 등장했고, 대부분 잊혔다. 두 작품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대신 잃어버린 것의 실체를 구성해내기에 특별하고, 그 자체로 굉장한 에너지를 준다. 두 작품은 또한 구성된 계보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방식의 역사를 만들어보도록 독려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관해 영감을 준다. <워터멜론 우먼>이 허구를 통해 진실을 겨냥한다면 <금발머리 부부>는 진실을 통과해 허구를 꿰어낸다. 덧붙여 두 영화는 비디오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워터멜론 우먼>에서 두녜이가 일하는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장소와 그곳을 가득 메운 비디오는 영화가 우리 손에 잡히는 물질이었던 것이 당연했던 시간을 연상시킨다. 특유의 편집 방식 역시 잃어버린 시대의 기운을 유쾌하게 소환한다.
두 편의 극영화 <비브르 앙상블>과 <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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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에서 소개하는 두편의 극영화는 모두 감독이 주연을 겸한 작품이다. 아나 카리나의 첫 장편 연출작 <비브르 앙상블>(1973)은 제목에서 필연적으로 카리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비브르 사 비>(1962)를 연상시킨다. 그녀 자신의 삶을 살던 <비브르 사 비>의 나나는 이제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고민하는 줄리가 되었다. 극장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1928) 속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과 불가능한 방식으로 마주 보던 눈물 짓는 얼굴은 이제 곧 연인이 될 남자와 첫눈에 반해 미소 짓는 얼굴로 변한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 몽타주가 보여주는 사랑의 이미지는 이후에 펼쳐지는 눈물과 폭력, 화해와 회한의 시간을 거친 뒤에 다시 반복된다. 사랑의 시간은 복원할 수 없을지라도 카리나의 얼굴만은 서사의 흐름에 저항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바버라 로든의 <완다>(1970)는 받아들이기 난감한 한 여성을 던져놓는다. 한 여성의 특별하고도 고독한 초상이라는 점에서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1975)을 연상시키지만 집이 곧 정체성이던 잔느와 달리 완다는 집을 잃고 떠도는 상태다. 완다는 원치 않은 범죄에 휘말려 남자의 일상적 폭력과 강압적 태도에 노출된다. 그런데 완다가 갖는 독특한 캐릭터는 그를 마주하는 이들이 행하는 폭력의 강도를 넘어선다. 캐릭터가 처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그녀를 수동적으로 만들지만, 소극적인 연루자였던 완다가 위기에 처한 남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장면에 이르면 영화가 캐릭터를 얼마나 복잡하고 세심하게 조각하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완다는 기본적으로 <비브르 사 비> 속 나나가 주는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오는데, 나나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면 완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상처받더라도 끝까지 사람들 속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부족했던 캐릭터가 인간으로서의 여성이라면, 분명 <완다>는 우리에게 한 인간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를 열광시키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모두 응축해놓은 것 같은 인간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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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희 감독이 보여주는 70년대의 한국
한옥희 감독의 단편 실험영화는 세상의 복잡한 초상과 대면하도록 안내한다. 그의 작품에는 늘 당대의 한국이 보이는데, 이때 한국의 모습은 외국인의 시선에서 흥미로울 만한 ‘한국적’ 포인트를 꼼꼼히 짚어내면서도 종국에는 모순적인 부분을 아우른다. 스틸 사진과 영상을 조합해 한국적인 색과 사물을 포착하는 한편, 흑백으로 처리된 전쟁의 이미지를 대조시킨 <색동>(1976)이 대표적이다. <구멍>(1973)과 <무제>(1977)는 당대의 현실에 관해 발언하는 작품이다. <구멍>은 어딘가 갇힌 채 소진된 사람이 탈출을 꿈꾸는 절박한 구멍과 성적 욕망을 배합하며 고정된 이미지를 탈출하며 넘나든다. 필름을 자르는 이미지가 강렬한 <무제>는 단순히 검열에 대한 정치적인 발언만은 아니다. 필름을 자르는 이는 검열관보다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그는 검열당하는 동시에 스스로 검열한다. 무엇보다 자른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기본 행위로서의 편집을 연상시킨다. 필름을 가위질하는 행위가 살점처럼 떨어지는 점토들, 피 흘리는 벽과 연결될 때 그것이 현실의 끔찍함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해도 결코 유머러스함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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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만지니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알려졌으며 당대의 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에 소개되는 단편에는 극영화적인 연출과 사회적인 논평이 가미된 특유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데뷔작 <미지의 도시>(1958)를 비롯해 6편의 단편이 상영되며, 그가 파올로 피자넬리와 제작한 마지막 영화 <두 개의 잊혀진 상자>(2020)는 마스터즈 부문에서 상영된다. 장례 의식을 다룬 <스텐달리(스틸 플레이)>(1960)와 로마 변두리 아이들의 물놀이를 담은 <습지의 노래>(1961)는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텍스트와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영화다. 이 두 작품을 비롯해 그의 영화에서 내레이션 외에 실제 현장의 소리는 오프된 경우가 많다. 들리지 않는 소리는 화면에서 보이는 움직임을 더 강렬하게 체감하게 한다. <스텐달리>에서 사람들이 장례 의식에서 내는 육성은 마치 누워 있는 소년을 깨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습지의 노래>에서 들리지 않는 소년들의 아우성이 보일 때, 관객은 장례식에 잠든 소년의 자리에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놓인 단단한 막을 체감하게 된다.
<검은 집>(1962)은 그야말로 침묵의 아우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의 <검은 집>은 집단적인 군중의 초상을 보여준다. 초상은 단지 얼굴에만 있지 않고 신체 곳곳을 파고든다. 한센병 환자들의 얼굴과 신체는 이들을 타자로 놓을 수 있는 관객에게는 일종의 끔찍한 볼거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카메라를 통해서만 가능한 마주침이다. 영화는 명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단지 내레이션에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마주 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독은 영화의 핵심인 ‘집은 검은색이다’라는 잠언과도 같은 문구를 그들에게 돌려주면서 인물들이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화는 검은색이다. 그것은 암흑이지만, 무엇이든 쓰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
글 김소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