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는 모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 <여파> 김진혁 감독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해방 직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의 지속적인 방해 때문에 조사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이 사건은 반민특위 후손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반민특위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취직, 유학, 여행 등 일상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 건 물론이고 평생 이념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여파>는 반민특위 후손들의 삶을 생생하게, 또 촘촘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EBS PD 시절 김진혁 감독이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제작하다가 돌연 다른 부서로 발령받으면서 그의 반민특위 프로젝트가 중단됐다가 10여년 만에 완성시킨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강산이 한번 바뀌는 동안 그의 반민특위 프로젝트는 어떤 길을 돌고 돌아 <여파>에 이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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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감독이 10년 전 중단된 반민특위 프로젝트를 다시 카메라에 담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반민특위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EBS에 있을 때부터 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처럼 영화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 EBS에서 진행하려던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반민특위 활동을 재연하는 형식이었는데 EBS를 퇴사한 뒤 다시 진행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도의적으로라도 반민특위 후손들에게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그들을 인터뷰라도 해볼까 해서 카메라를 장만했지만 원래 의도대로 애니메이션으로 재연하는 방식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래도 무리였다.
반민특위는 오랜 시간 숙제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2012~13년 당시 제작하려던 프로그램에서는 후손들의 목소리를 프로그램의 인트로나 아웃트로 정도로만 다룰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 반민특위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깊이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인터뷰의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음에도 그들은 프로그램에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간 반민특위를 소재로 한 방송 다큐멘터리 중에서 반민특위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거다. 원래 계획했던 프로그램이 제작되지 못하자 그들을 찾아가 사과하니 후손들이 밥을 사주면서 외려 격려해주었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여파>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될까.
다큐멘터리를 구상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반민특위를 잘 모르니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제목도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난 <6월6일>이었다. 1949년 6월6일 친일 경찰 40여명이 자행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을 시작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0여명이 검거되고 기소된 사건.-편집자), 김구 암살 사건(1949년 6월26일)까지 연달아 터지면서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제작비 때문에 처음 구상했던 내용은 현실적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반민특위 후손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인가.
카메라를 다시 들었을 때 이들을 인터뷰해보니 반민특위 후손으로 살아온 삶에 대한 증언이 매력적이고, 다루는 범위가 넓어서 인상적이었다. 짧고 굵은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초반의 방향과 달리 이들의 증언은 잔잔하지만 섬세해 휘어지는 현대사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이쪽 방향으로 승부를 걸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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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카메라에 담았을 때 어땠나.
10년 전에 이미 진행한 인터뷰였지만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를 진행하니 그들을 역사적 사건의 대상으로 바라봤구나 반성하게 됐다. 왜 과거에는 반민특위를 다이내믹한 현대사로 그려내려고 했을까. 왜 과거에 구상했던 컨셉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그들을 반민특위의 후손으로 대상화하는 것과 그들을 주체적으로 그려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생각들이 영화로 만드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유튜브에 트는 한이 있더라도 반민특위 후손들이 살아온 삶의 본질을 제대로 담아야겠다 싶었다. 그 점에서 <여파>는 성공의 결과물이 아닌 좌절의 여파인 셈이다.
반민특위 후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저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지만 반민특위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업, 대학 진학, 승진, 여행 등 일상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영화에도 잘 드러나지만 단순하게 말해 당시 친일파는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민족주의 진영을 ‘빨갱이’로 낙인 찍는 게 주요 전략이었다. 그러다보니 반민특위로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게 하는 등 크고 작은 불이익을 주었다.
이 대답이 <여파>가 강조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이 영화를 통해 친일 청산이 어떤 의미였나 생각하고 싶었다. 친일 청산은 레드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뒤 납북되거나 월북한 사람들이 있지 않나. 특히 월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확실히 논쟁이 벌어지고, 친일 청산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좀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기에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를 영화 속에서 일부러 강조하지 않았지만 또 배제하지도 않았다.
노일환 의원(반민특위 검찰차장)의 조카인 노시선, 김상덕 반민특위위원장 아들 김정륙, 정철용 반민특위 조사관의 아들인 정구충, 김만철 특경대원의 손녀 김홍현과 손녀사위 김선동 등 10여명이 한 증언의 길이만 무려 2시간50여분에 이른다.
처음에는 1시간30, 40분으로 편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명당 증언 길이가 길지 않고, 굳이 러닝타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가치가 있으려면 이들의 캐릭터가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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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반민특위 후손이 있나.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분들의 증언이 뭉클하다. 그럼에도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시선 선생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커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노시선 선생님은 평생 모은 반민특위 자료를 자신의 가죽 가방에 모아두셨다고 한다. EBS에서 일할 때 노 선생님의 사모님을 설득해 노 선생님을 촬영했는데 그때 선생님에게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고, 촬영을 많이 하지 못한 채 노 선생님이 병원 가실 때 따라간 적도 있다. 그때 가방 얘기 들으면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게 이 작품을 만드는 태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여파>는 감독으로서 김진혁이 변화하는 전환점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지난 10년 동안 이 작품은 내 연출을 많이 변화시켰다. 특히 취재원과의 관계 맺기가 깊어졌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태도가 변하면서 이제는 반민특위 회의가 열리면 참석을 안 할 수가 없게 됐다. 지난번에도 반민특위가 사단법인을 만들었는데 카메라를 안 가지고 가니 어르신들이 ‘왜 촬영을 안 하냐’고 하시더라. (웃음)
글 김성훈·사진 최성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