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적인 요소보다는 영화적인 요소에 집중하고자 했다.
:국제경쟁 대상 수상작 <파편> 나탈리아 가라샬데 감독
좋은 영화는 확실히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다. 1995년에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주의 리오테르세로에서 8mm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60분 가량의 영상은, 한 편의 영화가 되어 2021년 지구 반대편인 한국 전주에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고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나탈리야 가라샬데 감독은 수상 결과에 대하여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영화가 담고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가 어떤 나라의 관객들의 마음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파편>은 나탈리야 가라샬데 감독이 자신이 12살 때 찍은 비디오를 20년 뒤에 우연히 발견하면서 영화의 방향이 크게 바뀐 영화이다. 당초에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사건을 시사프로그램 느낌의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었던 가라샬데 감독은, 긴 고민 끝에 촬영을 마친 1차 편집본 대신 자신과 가족의 개인적인 모습이 담긴 이 영상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놀라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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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찍었던 비디오테이프를 활용해 만든 영화다. 그런데 그전까지 촬영해왔던 다른 버전의 영화가 있었다고.
10년 동안의 자료 조사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고발 다큐멘터리 형식의 1차 편집본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군수공장의 한 직원의 시선으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해나가는 구조였다. 기본적으론 내부 고발자의 이야기이며 나름의 반전도 있었다. 처음부터 개인적인 영상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영상을 발견하고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의 버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건 당시를 리얼 타임으로 찍은 영상이라는 것이 주는 힘을 높이 평가한 것도 있지만, 내가 찍었던 영상 그 자체가 주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대조성이다. 내가 그 당시 특별한 생각 없이 놀이처럼 찍었던 영상들의 장소는 지금 보면 전부 끔찍한 재난이 일어났던 장소인데,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들이 빚어놓은 비극이 하나의 화면에서 확인되는 장면이다. 이런 것들을 보며 미시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인 문제 구조를 드러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영화의 앞뒤로 카메라의 시선과 아이들의 태도의 대비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 또한 내가 지금의 버전을 선택하게 된 이유이다. 카메라가 변모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화 초반에 카메라는 하나의 장난감처럼 사용된다. 그저 시간을 보내는데 쓰일 뿐만 아니라 가끔은 오직 장난치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니까. 하지만 나중엔 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게 된다. 영화에 언론이 찾아오지 않는 장소에서 기자 놀이를 하는 장면이 있다. 지금 보면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놀이를 하고 있었던 거다. 사태의 비극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변한다. 처음엔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점차 조용히 어른들의 세계를 관찰하는 태도로 바뀐다. 그러다 이제 비디오 촬영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촬영은 계속된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촬영을 이어갔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감동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탈리야가 카메라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오직 과거의 나탈리야가 찍은 영상으로만 영화를 구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실제로 카메라를 더 이상 들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그래서 몇 영상은 남동생 니콜라스가 촬영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다시 카메라를 든 것은 언니가 아프게 된 것이 이유였다. 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다. 물론 과거 영상 외에 추가로 촬영한 자료들이 매우 많았다. 공장 내부 사람들이나 사고의 피해자들의 증언, 관련 소송 과정 등 모두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관점보다는 개인의 작은 시선으로 극을 이끌어가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보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여기에서 벌어졌던 일은 특수하고 상당히 거대한 사건이지만, 가족이라는 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 그래서 저널리즘적인 요소보다는 조금 더 영화적인 요소에 집중을 하려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감정적으로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다. 아빠와 딸이 춤을 추는 행복한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편치는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인 만큼 시종일관 감정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 만들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다시 봐도 행복한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세상의 모든 아빠와 딸들이 공감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 자체가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고 어두운 과거를 조망하고 있기에 엔딩만큼은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모든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끝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엔딩씬 바로 이전 아빠가 휠체어에서 자신이 쓴 글을 읽는 장면이었다. 아빠는 원래 글 쓰는걸 좋아하시는 분이었는데 기력이 쇠하신 모습을 영화에 넣는 것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다. 그렇지만 아빠와 대화 끝에 넣기로 결심했다.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그렇게 나쁜 측면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영화를 본 가족이나 영화에 출연한 당시의 이웃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매우 좋았다. 가족들만 따로 모아 별도의 시사회를 가지기도 했다. 테이프에 담겨 있던 영화에 사용되지 않은 영상들까지 디지털화해서 그것까지 같이 보기도 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빠와 언니, 그리고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의 추모 영화로 잘 쓰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영화를 보면 카메라를 뒤집어 뒤바뀐 위아래를 표현하거나, 높은 암벽을 오르는 등산가를 찍는 등 어릴 적부터 촬영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것인가.
어릴 적부터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남동생과 이를 재현하는 것을 즐겼다. 카메라의 일반적인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로 찍는 TV프로그램이 아르헨티나에 있었는데, 그런 걸 보면서 나름대로 따라했던 것 같다. 정확한 계기는 없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자연스레 영화의 길로 나를 인도한 것 같고, 대학교에서 언론 관련 공부를 하면서 사회현실을 다루는 영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위적인 연출이 배제된 현실이 담긴 영상을 다른 맥락에서 재사용하게 된 이번 경험이 참 귀중했고 흥미로웠다.
앞으로의 작업 계획이 궁금하다. 언젠가 전주에 올 날을 기대해도 되는 것인지.
나도 전주에 정말 가고 싶었다. (웃음) 이번에 가지 못해 무척 아쉽지만 다른 방식으로라도 꼭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다. 작업 중인 장편 다큐멘터리 한 편이 더 있다. 이번에도 역시 군수품과 관련된 것으로 1995년 폭발이 있었던 시기에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 대해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파편>과 연결고리가 있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
글 김철홍 영화평론가·사진제공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