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juIFF #4호 [기획]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단편영화 <심장소리> 상영 및 마스터클래스
“조금 힘들었는데, 이렇게 영화관에서 보니까 기분이 좋아요”. 아역배우 김건우가 수줍게 내뱉은 상영 소감이 팬데믹으로 인한 영화제의 침체와 관객들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해냈다.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한 이창동 감독도 인파가 꽉 들어찬 영화제의 풍경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설렌 관객들의 심장 소리까지 합쳐져 영화관의 북적임을 한껏 채웠다.
{image:1;}
전주국제영화제는 특별전 ‘이창동: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통해 이창동 감독의 첫 단편영화 <심장소리>를 4월 30일 최초 상영했다. 이어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며 <심장소리>를 비롯한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집중 조명했다. 대면 행사의 전면 정상화를 발표한 전주국제영화제의 야심 찬 기획이었다. <심장소리> 상영 후 주인공 ‘철이’역을 맡은 김건우와 이창동이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등장했고, 이창동은 <심장소리>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김건우의 연기에 상찬을 늘어놓았다.
“오늘 상영한 <심장소리>는 나의 첫 단편영화다. 이 자리가 극장에서 관객들과 보는 첫 자리기도 하다. 관객들과 함께 무엇을 느끼면서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새삼 특별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주인공 ‘철이’역을 맡은 김건우라는 배우를 여러분께 소개하게 돼서 기쁘다. <심장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숏처럼 보이는 영화긴 하지만, 7회차 정도에 걸쳐서 찍은 후 사이사이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어 붙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감정을 마음속에서 계속 연결하면서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을 테다. 그런데도 열심히 잘 연기해줬고, 때때론 놀랄 정도로 “어떻게 아이가 저렇게 할 수 있지? 아이니까 가능한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관객들이 따뜻하게 격려해주면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을 잊고 자신감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이후 이동진 평론가의 사회로 본격적인 마스터클래스가 시작됐다. <심장소리>의 기획과 캐스팅 단계부터 프로덕션 과정, <심장소리>에 대한 연출 의도와 함께 이창동이 우직하게 강조해온 영화의 본질에까지 길고 깊은 대화가 이어졌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인간 이창동의 담담한 진심까지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 이창동이 전한 말의 일부를 옮긴다.
{image:2;}
<심장소리>가 세상에 들리기까지
“<심장소리>는 WHO(국제보건기구)가 제안해서 시작한 기획이다. 나를 비롯한 해외의 감독들이 우울증을 주제로 해서 몇 개의 단편영화를 만들고 장편 옴니버스 영화로 합치는 방식이었다. 우울증이라는 것에 대한 경각심, 그게 우리에게 어떤 문제인지를 교육하고 홍보하는 목적인 것 같다. 취지가 좋다고 생각했고, 또 놀면 뭐 하나 싶어서 참여했다. 이상한 것은 내가 제안받기 전에 이미 어떤 감독들이 참여한다고 정해졌고 내가 마지막으로 승낙했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제일 먼저 만들었고, 다른 감독들은 아직 팬데믹 등의 이유로 만들지 않았다더라. 나머지 영화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영화는 2020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2주간 찍었는데 컴퓨터 그래픽 처리나 후반작업 때문에 작년 2월에 완성됐다. 영화를 너무 묵히고 있던 와중에 마침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하니까 이번 기회에 공개하자고 제안했고, 영화제 측도 승낙하면서 상영하게 됐다.”
시나리오 개발 과정
“혼자서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의 가족 이야기 설정을 몇 년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이걸 장편영화로 푸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장치와 이야기가 필요한데 왠지 모르게 2% 부족한 어떤 것이 있었다. 시나리오도 거의 만들어졌고 심지어 돈 들여서 테스트 촬영까지 했는데, 내가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못 먹었기에 유보하고 묵혀놓은 프로젝트가 됐었다. 그러다가 마침 우울증이라는 주제로 단편영화 의뢰를 받은 거다. 우울증이라는 게 너무나 익숙한 병이고, 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가까운 사람 중에도 앓는 이들이 있기에 누구에게나 고민해야 할, 공유해야 할 문제다. 이게 단지 개인의 문제는 아닐 거다. 우울증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는 거고, 그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한 개인이 겪는 질환이라고 생각해서 방금 말한 가족의 설정을 가지고 들어왔다.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그런 개념만 가지고는 영화화하기가 힘드니까 오정미 작가가 어릴 적 경험과 몇 가지 디테일을 가져왔다. 이를테면 엄마가 문을 안 열어주니까 겁이 나서 경비원한테 119를 불러달라고 했다거나, 가족 중 한 명이 옆집 베란다를 통해서 집에 넘어온 사례라든지 그런 디테일들을 오정미 작가가 이야기해줬다. 원래 장편 기획도 같이 고민했었으니 그런 이야기들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함께 생각했다.”
캐스팅, 김건우라는 보석
“캐스팅에 관해선, 요즘 방식에 따라 우선 인터넷 자료를 통해 수많은 아역 배우를 접하며 직접 만나봤다.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 건 감정의 풍부함이랄까 감정의 순수함. 그런 느낌을 가장 먼저 생각했고, 어렵지 않게 김건우 군이 눈에 띄었다. 물론 바로 쉽게 결정한 건 아니다. 눈에 띄었기에 직접 만나봤더니 내면이 건강한 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심장소리>는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를 둔 아이의 이야기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아이는 연기하며 쉽게 감정이입을 한다. 제대로 연기하려면 배역의 감정을 내면화해야 하는데 거기서 아이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 점을 조금 걱정했고, 배우 본인과 배우의 어머니와도 여러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은 흔히 터무니없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나. 부모나 가족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경험들. 김건우 역시 이러한 감정적 경험이 있지만 튼튼한 느낌이었다. 부모님들까지 모두 내면이 건강하다. 그러니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를 아이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단 느낌이었다.”
모험의 서사
“<심장소리>가 우울증을 다루는 심각한 이야기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로 뭐랄까 원초적인 모험 이야기라고 할까. 가장 단순한 욕망을 가진 아이,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죽어가는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욕망을 가지고 모험을 겪는 아이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그런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전개를 가진 이야기 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떤 모험 이야기를 보면 시험의 과정,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용기를 시험하거나, 연민을 시험할 수도 있고, 지혜를 시험할 수도 있고, 연민을 시험할 수도 있는데 <심장소리>에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약간의 테스트들이 있다. 옥상에 올라가 엄마를 봐야 해서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엘레베이터 버튼을 아기가 대신 누르면 안 되냐고 하는 것들. 이런 시험들을 이겨내면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방식이다. 모든 모험 이야기처럼 철이가 비눗방울에 유혹당하기도 하지만 엄마를 향한 모험을 꿋꿋이 해내는, 아주 원형적인 서사의 느낌이랄까. 이런 것들을 관객이 느끼고 체험하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영화만의 힘
“<심장소리>는 소년이 교실에서 화장실 가겠다고 일어난 그때부터 엄마를, 살아있는 엄마를 안기까지 끊임없이 달리는 이야기인데 보다시피 하나의 테이크로 되어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장편영화에서도 이런 형식을 볼 수 있는데, <심장소리>가 무언가 기술적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다기보다는 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욕망, 아이의 마음,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생명에 대한 갈구라고 할까. 아이의 가슴에 뛰는 심장 소리를 관객이 같이 느끼고, 아이의 표정에서 한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은 마음을 끝까지 견지하게 하고 싶었다. 아이의 마음이 점점 고조되면서 관객이 함께 마음을 느끼는 것이고 아이가 어떤 영웅적인 행위를 했다거나 대단하다는 것보다는 생명에 대한, 엄마에 대한 아이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감정이 아이의 불안을 담아낸 것이든, 아이가 지닌 생명력의 증거이든, 그 심장 소리 같은 것을 관객이 모두 공유하도록 영화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게 영화 매체가 가지는 힘이 아닐까.”
촬영
“한 테이크 촬영에서 카메라가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것보다도 얼굴 앞으로 같이 뛰는 건 당연히 더 어렵다. 촬영팀이 며칠을 연습했는데, 아이를 데리고 할 수는 없으니 어른의 배에 얼굴 그린 종이를 붙이고 연습했다. 아이의 감정이 리허설을 통해 반복되면 문제가 생긴다. 단 한 번 경험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게 영화 매체의 영화적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 연습을 많이 하면 연습한 대로 하게 된다. 동선은 알아야 하니까 아주 기본적인 리허설은 했지만 거의 처음 느끼는 감정을 찍기 위해서 늘 조심했다. 아이의 감정, 아이의 표정에 초점이 잡혀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조단역들은 대화를 나눠도 화면에 들어오지 않고, 들어온다고 해도 초점이 나가 있다. 참여하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이런 컨셉을 잘 이해해줬고, 이것에 맞춰서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심장소리
“팬데믹을 거치며 OTT 등을 통해서 관객들이 극장에서 멀어지고, 영화 매체를 받아들이는 태도나 습관 자체가 바뀌고 있다. 영화를 보는 태도가 조급해지고 OTT를 보다가 재미없으면 쉽게 영화에서 빠져나가거나 한다. 그럼에도 영화 매체의 본질은 여전히 영화 속의 시간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고, 그 경험을 공유하면서 타인, 나와 다른 누군가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에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예술 매체보다도 영화는 강력한 매체다. 아무리 관람 태도가 바뀐다고 해도 이런 것까지 인류가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전달하는 창이 바뀐다 해도 영화 속 인물이 경험하는 감정을 같이 경험하는, 바로 옆에서 그 심장 소리를 나누어 갖는듯한 느낌을 <심장소리>에서 전달하고 싶었다. 엄마를 안는 아이의 포옹은 아마 세상의 그 어떤 포옹보다도 원초적이고 강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과 안정을 선사하는 것이겠다. 그런 것을 관객과 함께 느끼고 싶었다. 대화가 없어도 얼굴만으로도 인물이 도대체 어떤 생각과 고통과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지, 설명되지 않는 얼굴 자체로 전달되는 감정을 관객이 느끼길 바랐다. 관객에 따라서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 영화적 소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image:3;}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특별전 제목인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은 장 프라수아 로제가 나에 관해 쓴 책의 머리말 제목이다. 어떤 맥락으로 중요히 생각해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영화에 대해 한 마디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화를 하면서 고민했던 게 이런 점이다. 내가 소설을 쓰다가 이 세계로 왔기 때문에. 문학은 문자로 되어있지만, 문자로 완성돼 있지 않다. 독자가 자기 상상력으로 문자 이상의 것을 상상해 완성한다. 반대로 영화는 눈에 보여주지 않나. 눈에 보여주니까 눈에 보이는 것 외의 것이 있단 걸 잊어버리기가 쉽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 안 보인다는 것이 있다는 말은 굉장히 총체적이다. 카메라가 찍은 곳 옆의 공간은 안 보이고, 없다고들 흔히 생각한다. 혹은 찍어놓고 편집에서 빼버리면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사실 우리 삶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경우가 많다. 영화는 일부를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망각하게 하거나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환기해서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게도 만든다. 나는 영화가 후자를 하는 매체라고 생각하고 믿는다. 보여줌이 강력한 힘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것을 주관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일깨우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 매체의 본질이다.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고민했는데 이런 생각은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돼 있다. 촬영도 선택, 카메라의 흐름도 어떤 의도에 따라서 선택하고 심지어 편집에서는 어떤 것을 선택적으로 빼야 한다. 영화 프로덕션과 영화를 완성하는 모든 과정에 걸쳐서 보여주지 않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힘이 충돌할 때 후자에 강력하게 힘을 줄수록, 이를테면 클로즈업이 많을수록 감정이입이 잘 되면서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빨리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잊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항상 고민하면서, 그 모순에 갈등하면서 영화를 만들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태도의 문제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방법론이라는 건 사실 나도 딱히 모른다. 안다면 영화를 쉽게 찍을 텐데. (웃음) 나한테 그것은 태도의 문제다. 태도에서 출발한다. <밀양>의 예에서 제목이 밀양이고 공간 배경이 밀양이면 밀양의 멋있는 장소들, 영남루 같은 곳들을 찍어서 밀양이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건 우리의 너무나 보잘것없는 삶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다.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은 누구한테나 주어져 있기에 모두가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나. 우리 모두, 나든 여기 있는 사람 누구든 자기 삶의 공간이 있고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영화감독으로서 밀양은 부족하고 불편한 점이 많다. 길도 좁고 공간도 좁고 카메라 들어갈 곳도 없고 뭘 카메라에 담아도 별 게 아닌 것 같고. 그러다 보면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런데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별것 아닌 삶에서 구원과 의미를 찾는 것인데 별것 아닌 공간이라도, 답이 안 나오는 공간이라도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그 무슨 순진한 생각이냐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 태도가 중요하다.”
필연성과 우연성
“영화뿐 아니라 서사를 다루는 매체는 모두 본질적으로 보편성과 개별성의 문제에 부딪힌다. 이를테면 어떤 서사든 플롯과 인과관계를 만든다. 무언가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로 어떻게 됐냐는. 곧 필연적인 사건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연적인 사건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다른 것들이 끼어들면 그게 불필요하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누가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을 당한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디테일들로 영화를 구성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일상 같은 것들이 들어가면 불필요하고 필연성에서 벗어나게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필연적인 것만으로 삶을 살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필연이라고 느끼지만, 사실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필요한 것만 보여주면 서사는 효과적일지라도 삶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필연성이냐 우연성이냐 사이의 수많은 거리 안에 수많은 삶과, 삶을 다루는 태도와 진실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대체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의 감정을 연기할 때 경험이 많은 배우이든, 김건우 같은 순수한 마음의 어린이든 본질적으론 같은 과정을 거친다. 자기가 파악하고 있는 인물, 그 내적 동기에 의해 연기한다. 그 내적 동기의 연기는 자기 속의 필연성을 찾는 과정인데, 그 필연적 내적 인과에 의해서만 연기하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처럼 연기하게 된다. 필연성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 보여주면 누구나 그렇게 연기할 것처럼, 관객이 예상할 것처럼 연기하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을 진짜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게 배우의 딜레마고 어려운 점이다.
이야기도 아주 잘 짜인 플롯을 보면 감동이 없다. 그 인과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우연적인 게 들어가면서도 필연이어야 삶의 의외성이 있고, 영화가 재밌으면서도 진짜 같이 느껴진다. 필연성과 우연성의 관계는 굉장히 모호하고, 어떤 식으로 영화에 담아내는가 하는 것은 영화하는 모든 사람의 숙제일 수밖에 없다. 나도 많이 보고 있지만, OTT 작품은 거의 다 필연적인 이야기로만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점점 더 관객이 익숙하게 보도록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배우가 필연적으로, 인과관계로, 내적 필연성으로만 연기하면 뻔해 보인다. 그걸 넘어서는 어떤 개별성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 연기고, 영화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TV 드라마와는 조금 다르다. TV 드라마는 대체로 누구나 그렇게 살 것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끔 하여 이입하게 만드는데, 영화에서 그렇게 한다면 뻔해 보인다. 영화 관객은 의외성을 찾는다.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외 적인 것, 일회적인 것, 우연적인 것, 일생에 한 번만 보여줄 것 같은 연기를 볼 때 감동한다. 이 과정이 배우들에게는 굉장히 어렵고, 내가 배우를 곤혹스럽게 한다는 게 이런 것일 테다. 배우들도 내 말을 알아듣겠지만, 이런 연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뭐랄까 여러 화학작용이 필요하다. 또는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얻어걸려라’라는 방식이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다.
나는 촬영장에서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한다. 대본이 있고, 대본을 바탕으로 오늘 찍을 분량을 준비한 콘티가 있고, 그 계획대로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이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하지 않은, 예정되지 않은 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예상했던 배우의 연기를 넘어서는 의외의 모습일 수도 있고, 또는 빛과 자연의 모습,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 촬영하면서 드는 직관 때문에 계획과 다르게 찍어내는 무엇일 수도 있다. 그게 나오지 않으면 그날 촬영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 중 하나다. 표면적으로는 아주 부드럽게 잘 진행되고 있는데 감독은 못마땅해하고 있다. 대체 뭘 못마땅해하는지 알 수가 없을 테다. 사실 계획대로 부드럽게 잘 흘러가는 것이 문제다. 그냥 준비된 대로만 하는 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란 우리의 삶처럼 우연한 순간의 포착에서 온다. 신의 흉내를 내서 모든 걸 다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연출 바깥에서 우연히 들어오는 게 진짜고 그걸 포착해내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25년의 시간
“25년이라곤 하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냥 몇 년쯤 같다. <시>가 끝나고 <버닝>을 8년 만에 내면서 ‘정말 8년이나 지났단 말이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젊었을 땐 시간이 지겹도록 느리게 가고, 나이가 들면 반대가 되어 간다. 크게 보면 계속된 방황과 모색의 기간이었다. 20대 이전 10대 소년일 때부터 나는 나 혼자 뭔가 글 같은 걸 끄적였다. 꼭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졌다. 20대에 잠깐 연극도 하고,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소통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졌던 것 같다. 소통의 의미를 나에게 계속 질문하고, 삶의 행로에 꽉 연결했다. 나처럼 80년대에 글을 쓰던 사람은 현실을 어떻게 바꾸고, 사람들이 삶에 희망을 찾게 만들기 위해서 내 소설이 얼마만 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80년대에 글을 쓰며 느꼈던 소통의 욕구가 내면화됐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강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됐고 이런 삶을 살게 됐지만, 감독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잡지 화보 같다. 종이 질이 굉장히 좋고 화려하지만, 그 종이로는 뭔가를 하기가 조금 어렵다. 코를 풀 수도 없고 보기에만 좋다. 이쪽 동네의 삶이란 게 그럴 수 있다. 이런 자리도 그런 것 중 하나다. 사인하고, 레드카펫 밟고, 그런데 그게 공허할 수 있는. 무언가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공허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영화를 하거나 영화로 삶의 가치를 찾으려 하겠지만, 늘 반대급부는 있다.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시간도 빨리 가고.”
{image:4;}
“오늘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돼서 굉장히 기쁘고 고맙습니다. 어제부터 제가 특별전을 통해 극장에 들어와서 관객분들을 만나는데요.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는 게 얼마나 감동적인 건지, 얼마나 행복한 건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영화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면, 극장을 찾아주시면 이제 영화제가 끝나고도 한국 영화계 전체에 활력을 주시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스터클래스를 끝내며 건넨 이창동의 진심 어린 인사말은 ‘마스터’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마무리였다.
[글·이우빈, 사진·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