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onjuIFF #7호 [인터뷰] <파로호> 임상수 감독
끝까지 모호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알수록 미궁처럼 빠져드는 알프스 모텔엔 도우(이중옥)와 몸이 편치 않은 노모가 생활한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모텔을 관리하며 살뜰히 엄마를 모시던 도우는, 어느 날 밤 엄마가 실종된 모텔에서 눈을 뜬다. 엄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정체불명의 손님만 모텔을 들락거린다. 실종자는 하나 둘 늘어나는데 진실을 알려 들수록 오히려 사건은 수렁 속에 빠진다. 임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파로호>는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교묘히 무너뜨리며, 관객으로 하여금 끝없는 추리를 펼치게 하는 작품이다. 도우의 엄마는 어디로 증발했고 손님의 정체는 무엇이며, 진실은 모텔의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임상수 감독은 “그 모호함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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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쓴 단편이 <파로호>의 단초가 됐다고.
모텔을 운영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장편 아이템을 고려할 때 친구가 ‘그때 쓴 걸 확장해봐라’라고 해서 다시 수정하던 차였다. 호수 옆에 있는 모텔이 배경이면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자료를 조사하다 파로호에 대해 알게 됐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설명이 와닿았고, 나아가 ‘주인공에게 오랑캐가 온다’는 설정을 떠올리고 나니 영화가 쉽게 풀렸다.
‘알프스 모텔’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힘이 확실히 있다. 낡고 스산해 사연이 많아 보인다고 할까.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할 때부터 모텔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파로호 근처에는 마땅한 곳이 없어서 여기저기 헤매다 결국 고성에서 찾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여기다”라고 확신했다. 주인이 부동산에 내놓아서 운 좋게 촬영도 가능한 상태였다. 알프스 모텔은 영화의 로케이션이자 모든 스태프들의 숙소였다. 다들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영화 초반부터 호텔에서 물이 새는데 이 문제는 끝내 고쳐지지 않는다. 어떤 의미를 담고자 한 연출이었나.
모텔 자체가 도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에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는 사람이었는데 균열이 생기면서 조금씩 자신의 바람이 흘러나왔던 거다.
주인공인 도우의 행동 중 가장 이해가 되지 않던 게 어느 날 갑자기 들른 호승(김대건)에게 굉장히 관대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손님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도우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엄마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다만 그만큼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지 못하고 호수처럼 한 곳에 정체된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호승은 여러모로 도우와 반대되는 유형의 인물이다. 앞서 말한 ‘주인공에게 오랑캐가 온다’는 설정의 오랑캐가 호승인가.
그렇다. 호승이는 좀 고압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이었으면 했다. 본인이 분위기를 휘어잡으려는 인물이었으면 해서 호승을 연기한 김대건 배우에게 따로 요청을 했다.
이중옥, 김대건 배우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이중옥 배우의 경우 과거엔 주로 악역을 많이 맡서 만나기 전에 걱정을 좀 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 굉장히 젠틀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도우는 기본적으로 착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중옥 배우에게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건 배우는 오디션을 봤는데 도우와 반대로 깔끔하고 샤프한 이미지가 좋았다. 단정한 외모를 지녔지만 말할 땐 칼이 있다는 점이 호승이와 비슷했다. 도우가 자신만의 규율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면 호승이에겐 자유가 중요했다. 그래서 이중옥 배우와는 도우의 전사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캐릭터를 구축해 간 반면, 김대건 배우에겐 자유도를 많이 줬다.
공민정, 강말금 배우도 작지만 비중이 큰 역할을 맡았다.
낡은 변두리 시골이 배경인 이 남성 중심적인 영화에서 중심을 잘 잡아주는 형사를 연기해 주길 바랐다. 역할이 작다 보니 과연 해주실까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출연하겠다는 답을 주셨다. 강말금 배우가 연기한 미용실 주인은 도우와 교집합이 많다. 남편을 돌보는 고통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 느껴진다고 생각했고. 미용실 앞에서 담배 피우는 마지막 장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가 도우만 남겨놓고 일부러 미용실을 비우는 건지, 아니면 별 뜻 없는 건지 모호하게 남겨두려고 했다. 개인적으로 그 뒤로 도우의 해석을 바라보는 게 재밌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 도우는 계속 불안과 긴장에 시달린다. 버릇처럼 자신의 감정을 참고 눌러보지만 미리(김연교)를 만난 뒤로 결국 터져버린다.
69~71신. 그 장면은 신 번호도 잊히지 않는다. (웃음) 그 전에는 도우의 감정이 압축되기만 했다면 여기선 도우가 불안한 상태로 완전히 내몰리고,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면서 상황이 뒤바뀐다. ‘여기서 감정이 터진다‘는 느낌을 줘야 했기 때문에 호승과 싸우고 미리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정말 잘 찍고 싶었고, 그만큼 부담이 됐다. 그 신이 끝낸 뒤에야 마음이 안정이 되더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도우의 환상인지, 가령 호승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반복해 등장한다.
끝까지 모호함을 가져가는 게 이 영화의 콘셉트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영화가 모호하게 끝나는 게 괜찮은지에 관해서 교수님도 그렇고 주변의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저는 호승이를 실존 인물로 봐도, 도우의 또 다른 자아로 봐도 해석이 가능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보는 이가 완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관객들이 이 모호함을 어떻게 봐주실지 더 궁금하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언제 처음 시작됐나.
고등학교 때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다녔다. 주말에 집에 들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게 너무 싫어서 항상 극장에 들렀다. 2000년대, 유독 좋은 한국 영화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그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대학 때도 영화 동아리에 들었다. 사실 그냥 영화를 관람하는 동아리에 들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영화 ‘제작’ 동아리였던 거지.(웃음) 여름방학 때 단편을 만드는데 너무 즐겁더라. 광고홍보학을 전공했지만 전공 공부보다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다.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선 임순례 감독님의 연출부에서 두 작품을 했고, 장편 시나리오를 7~8년 정도 쓴 뒤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과정을 밟으며 <파로호>를 만들었다.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나. 앞으로도 스릴러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장르 영화를 선호한다기보다는 죽음 다음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어린 시절 기억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내가 연출한 다른 단편들은 주로 드라마를 다뤄왔다. 그래서 다음엔 좀 따뜻하고 밝은 작품을 연출해 보고 싶다.
전주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관객들에게 <파로호>를 선보이게 됐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나.
자기 안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고려해 주시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그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들 자신이 올곧고 바르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그 안에 작게라도 악한 마음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한 번쯤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글·조현나, 사진·오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