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X전주국제영화제] #2 인터뷰: 백현진 프로그래머
2023-04-28 09:00:00

J 스페셜: 백현진 프로그래머 인터뷰

백현진은 배우이자 화가, 음악가, 현대미술가다. 박찬욱 감독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백현진과 장영규 음악감독의 어어부 프로젝트가 보여준 독창성에 찬사를 보냈고, 설치미술가로서 그는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등의 작품에서 백현진을 배우로 처음 인식한 사람들은 그가 천재적인 신 스틸러라고 생각한다. 전주국제영화제(이하 전주영화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된 백현진은 루이스 부뉴엘 만년 3부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 <자유의 환영>(1974)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 그리고 그가 출연한 <뽀삐>(2002) <경주>(2014)를 선택했다. 백현진의 연출작 <디 엔드>(2009) <영원한 농담>(2011)도 관객을 만난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서울 연남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아 루이스 부뉴엘과 그의 연기 경력,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는 백현진의 예술 작업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 배우 류현경, 연상호 감독에 이어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됐다. 문석 프로그래머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바로 수락했다고 들었다.

= 문석 프로그래머가 <씨네21> 기자였던 시절에 인연이 있었다. 문석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기억이 좋았다. 연락을 받았을 때 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는 개인적인 이유로 참여할 수 없다고 하자, 문석 프로그래머가 웃으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 세 편, 내가 참여했고 관객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을 고르면 된다더라. 먼저 루이스 부뉴엘 만년 삼부작이 테트리스 맞춰지듯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출연작 중에는 장률 감독의 <경주> 그리고 <뽀삐>를 골랐다. <뽀삐>는 러닝타임이 짧아서 내가 연출한 작품 두 편을 묶어서 함께 상영한다. 사실상 관객 분들은 총 7편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다. 티켓값도 올랐는데 이 정도 구성은 필요하다. (웃음)

- 루이스 부뉴엘의 만년 삼부작이 단번에 생각난 이유는 무엇인가. 출연작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뽀삐>와 <경주>를 고른 배경도 궁금하다.

= 젊었을 때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 죽기 전 찍었던 세 편의 영화를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다. 굉장히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인류의 문명, 역사, 감정처럼 복잡한 이야기들을 무척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 같아 놀라운 작품들이다. 그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친구들 영화제에서 봤지만 나머지 두 편은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세 편 모두 극장에서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른 작품들이다. 출연작 가운데 박찬욱, 김지운, 류승완, 홍상수 등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이 많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덜 본 영화를 선택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들 사이에서 내 연기가 회자되기 시작한 작품이 <경주>다. “백현진 영화 봤어? 연기를 진짜 이상하게 해.” 장률 감독님이 중국에서 만든 영화들을 특히 좋아하기도 해서 이번 영화제에서 감독님 작품을 틀고 싶었다. 장영규 음악감독이 김지현 감독의 영화를 계속 작업했는데, 당시 그 감독의 영화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뽀삐>를 골랐다.

- 연출작 <디 엔드> <영원한 농담>은 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적이 많지 않은 작품들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하거나 해외 미술관에서 전시한 것 외에는 보기 어려웠던 작품들이다. 그래서 <뽀삐>와 함께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현대 미술에서는 비디오라고 부르고 영화 쪽에서는 단편 영화라고 칭하고 나는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동영상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현대 미술 쪽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이름도 가져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건 전혀 아니었다.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 음악으로 풀릴 때도 연기로 소화할 때도 그림으로 그릴 때도 있는데 내가 그동안 다뤘던 매체로는 풀리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판단했을 때 훈련이 잘된 배우들과 동영상으로 작업하면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을 추적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동영상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다. <디 엔드>의 채수진 프로듀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오래 일했는데, 편집이 끝난 후 자신의 네트워크가 있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이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인연이 열렸지만, 당시 개인적인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앓아서 작품을 그냥 묵히게 됐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와 배우들, 김우형 촬영 감독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좀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선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작년에 어떤 인상적인 하루를 경험했다. 이것을 동영상으로 찍으면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 이은 ‘끝 삼부작’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연출할 영화의 제목은 <하루 끝의 끝>이다. 트릴로지가 완성되면 OTT에서 공개하든 유튜브에 올리든 하려고 한다. 아마 내년쯤 만나보실 수 있을 거다.

- 신작은 영화제에서 공개될 가능성이 높은가.

= 일단은 그렇게 하려고 생각 중이다. 짐 자무쉬가 미국 <SNL>(Saturday Night Live)에서 연출했던 에피소드를 묶어 장편 영화로 만든 <커피와 담배> 같은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디 엔드>는 류승범, 박해일, 엄지원, 문소리가 출연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고 <영원한 농담>은 박해일, 오광록의 듀엣 쇼다. 어떤 죽음과 이별을 다루는 이번 작품은 여성 배우들이 중심이 될 것 같다.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 이어 <하루 끝의 끝>도 김우형 촬영감독이 찍어주기로 했다.

- 연출자로서 루이스 부뉴엘에게 받은 영향도 있나. 이번에 상영하는 <디 엔드> <영원한 농담>에서 부뉴엘스러운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을까.

= 부뉴엘을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다. 어떤 매체든 레퍼런스 없이 작업한다. 오히려 20대 초반부터 교류했던 홍상수 감독을 피해 가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어어부가 <강원도의 힘>의 엔딩곡에 참여하게 되면서 영화를 미리 봤는데, 내가 기존에 알던 영화와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홍빠’가 됐다. 계속 신작을 내놓은 어마어마한 예술가와 언어도 지역도 같고 가끔 물리적으로 볼 수도 있고 같이 술도 마시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디 엔드> 때는 횟집에서 너스레를 떨며 일부러 술이 아닌 사이다를 마시는 장면을 넣는 식으로 홍상수 감독과 유사한 요소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엄지원 씨가 선을 보는 장면도 고정 샷으로 찍으면 홍상수 감독 느낌이 날 수 있다며 김우형 촬영감독에게 없애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 <경주> 상영 후 배우 박해일과 1시간 정도 토크 시간을 갖는다. 박해일과는 언제부터 인연이 있었나.

= <디 엔드>에 출연한 배우들은 그동안 나와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이 섭외해 줬다. 홍상수 감독, 김지운 감독이 다른 주연 배우들을 연결준 후 박찬욱 감독에게는 박해일을 섭외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나한테 왜 제일 어려운 사람을 시키냐. 박해일은 누구 말도 안 듣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예전부터 너무 좋아했던 배우라며 해일이에게 연락하자 마침 어어부의 팬이었다며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

- 처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건 언제였나. 초창기 출연작 중 <뽀삐>와 <꽃섬>은 어떻게 연이 닿은 작품인지 궁금하다.

= 장영규 형이 <반칙왕>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나는 주제곡과 삽입곡을 불렀다. 그때 김지운 감독님이 영규 형과 내가 룸살롱에서 연주하는 오부리밴드 역을 해주면 설렁탕을 사준다고 해서 연기를 하게 됐다. (웃음) 이후에도 가끔씩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 <뽀삐>를 연출한 김지현 감독의 언니 김나영 씨가 좋은 작업을 많이 해온 현대미술가다. 자매가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 나도 참여했다. 그 인연으로 김지현 감독이 <뽀삐>를 만들 때 연락이 왔다. <꽃섬>은 송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간과 감자>를 보고 흥미를 느끼던 와중 우연히 인연이 닿았고, 그쪽도 어어부의 음악을 좋아해서 서로 마음이 열려 영화 출연까지 이어진 케이스다.

- 개인적으로는 <내일 그대와> <붉은 달 푸른 해>를 보면서 연기를 신기하게 하는 배우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아는 감독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백현진의 연기가 회자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 전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들, 이를테면 윤제문 같은 사람에게 연락받기 시작한 건 <경주> 때부터였다. 하지만 업계에서 받는 콜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찍은 드라마가 <내일 그대와>였다. 당시 대부분의 반응은 “일반인 아냐? 나도 연기 하겠다”였다. 혹은 진짜 그 캐릭터로 보인다며 놀라는 반응도 있었다. 얼굴이 알려지기 전 배우가 일종의 어드밴티지를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 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부터다. OTT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국가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배우를 보는 시각과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얼마 전에 <뽀삐>를 다시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내 연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뭔가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그놈이 그놈이더라. (웃음) 바뀐 건 내가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이들의 경험이다.

- 배우이자 화가, 설치미술가, 행위예술가, 음악가이기도 하다. 각각의 정체성이 다른 영역의 창작에 주는 영향도 있나.

= 완전 있다. 최근에 더 체감하고 있다. 서로 연동되면서 긍정적으로 확장된다. 음악가와 미술가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평소 사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라 모임도 전혀 안 다닌다. 오죽하면 오늘 회사 회식도 안 간다고 했겠나. (웃음) 그러다 현장에 연기하러 가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시적인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혼자 계속 고립된 것보다는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보컬리스트나 음악가, 미술가로서 즉흥에 훈련이 됐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할 수 있다. 슛 들어갈 때 실시간으로 새기는 변수에 적응하면서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나운 빌런이나 성격이 순한 아저씨를 연기하면 그 캐릭터의 성격이 다음 날 그림을 그릴 때 묻어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의 정체성이 연동되면서 OS가 안정화되고, 나는 유저로서 이를 운용하는 능력이 점점 늘어가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참 재미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