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스비디오' 김용만 대표, ‘킴스비디오’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
뉴욕 이스트빌리지 시네필들의 성지, 킴스비디오를 아는가. 이곳은 쿠엔틴 타란티노와 스파이크 리의 단골 비디오 대여점이자 코엔 형제가 600달러의 연체료를 저당 잡힌 대여점이었다. 1986년 개업 이래 10개의 체인 지점이 생길 정도로 성업한 킴스비디오는 비디오 문화의 쇠퇴로 2008년 폐업을 결정한다. 킴스비디오의 단골이었던 두 감독 데이비드 래드먼과 애슐리 새이빈은 다큐멘터리 <킴스비디오>를 통해 킴스비디오의 현재와 김용만 대표의 흔적을 추적한다. 5만 5천여 개에 달하는 컬렉션이 보관 중이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소도시 살레미는 정치 스캔들로 상황이 복잡해지고 래드먼 감독은 킴스비디오의 컬렉션들을 다시 뉴욕으로 들여오고자 한다. 그리고 두 감독은 마침내 김용만 대표와 연락이 닿는다. 여럿의 노력으로 킴스비디오는 2022년 3월 재개장한다. 킴스비디오는 곧 김용만 대표의 한결같은 영화 사랑의 현신이다. 그를 만나 70, 80년대 영화광들의 삶, 킴스비디오의 찬란한 과거와 그가 다시 만들어 갈 킴스비디오의 미래에 관한 대화를 청했다.
- <킴스비디오>를 보면 찰리 채플린의 16mm 필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매혹됐다는 언급이 나온다. 당시 풍경이 궁금하다.
= 당시엔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부르지 않았나. 동네 어른들이 우리 활동사진 보러 가자 말하던 시절이다. 군산에 살던 어린 시절 우리 옆집에 미군 공군이 살았다. 그 공군의 아내와 친했다. 그 집에 놀러가 늘 <모던 타임즈>를 보여달라 요청했다. 옷장 대용으로 쓰던 두 개의 못 위에 흰 리넨을 걸어 옷들을 덮고, 그 리넨을 프로젝터 삼아 영사기에 16mm 필름을 걸어 수없이 그 영화를 봤다.
- 그렇게 영화에 빠져 살다 1979년 이민을 간 후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s)에서 영화프로덕션을, 뉴저지 라마포 대학에서 영화사를 전공하기도 했다. 그 시기 당신이 가장 매료됐던 시네아스트는 누구인가.
= 스탠리 큐브릭이다. 그의 반항 정신을 좋아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을 보면 기득권에 부딪쳐 무언가를 쟁취하는 삶이 많이 나온다. 23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지금은 영화 애호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다양하다. 당시 영화 애호가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었나.
= 우린 서로를 필름 밥(Film Bob)이라 불렀다. 필름 밥들과 끼리끼리 모이다 보면 그게 커뮤니티가 됐다.
- 70, 80년대 필름 밥들은 어떻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었나.
= 도서관을 많이 다녔다. SVA 도서관, NYU 지하 도서관 등. 그러다 큰 맘 먹고 24살에 36권짜리 필모그래피 백과사전 전집을 사 버렸다! 부자도 아니었는데 거금을 들여 샀다. 영화에 나오는 우리 집 서재에 꽂힌 파란 책들이 그 책이다. 그 책을 보고 킴스비디오에 에디슨이 만든 영화도 구비했다.
- 처음 킴스비디오를 연 당시만 해도 영화를 구해 본다는 개념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희귀한 영화들은 어떻게 공수했나.
= 킴스비디오를 열 당시부터 나의 콘셉트는 ‘우리는 다르다’였다. 다르지 않고선 대형 비디오 체인들과 맞붙어 승산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처음 구상한 것이 한국영화다. 알음알음 한국영화를 가져오려 했지만 소유권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게 굉장히 복잡했고, 몇몇 소유권자들은 당시 한국영화가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도 상당한 금액을 요구하기도 했다. 영화 하나를 가져오면 우리가 영문 자막도 넣고 더빙도 하며 아트워크 작업도 새로 해야 했다. 수지타산이 안 맞아 포기할 무렵 뉴욕의 한국문화원을 방문하게 됐다. 거긴 심지어 영화를 무료 대여해주더라. 그래서 우리 사무실에서 복제 후 슬리브도 신규 제작해 매장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을 시작으로 동구권 영화들도 킴스비디오에 구비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체코, 헝가리 문화원 등지를 순회했더니 다들 한국문화원처럼 흔쾌히 자국 영화들을 빌려주었다. 심지어 유럽영화들은 PAL 시스템(아날로그 비디오 시스템 중 하나로, NTSC와 PAL이 있다)이어서 미국 비디오 플레이어로는 재생을 못 했다. 미국 비디오 시스템에 맞게 전환하는 작업도 킴스비디오의 몫이었다. 주변 영화과 대학교수들이 정말 좋아했다. (웃음) 후엔 중국, 북한 영화도 가져다 놓게 됐다.
- 아무래도 복제본을 대여품으로 내놓으면 법적 분쟁도 피할 수 없었을 듯한데.
= 툭하면 변호사들에게 서신이 왔다. 컬럼비아 픽처스는 급기야 연방 검찰에 우릴 고소했다. FBI 직원들이 우리 가게로 쳐들어오는 영화 속 그 장면이다. 우리가 컬럼비아 픽처스보다 먼저 비디오로 만들었고 우리가 이 작품의 저작권으로 수익을 내진 않았다 변론했고, 결국 무죄를 받았다. 많은 제작사로부터 공갈, 협박을 받았지만 내 입장은 한결같았다. 배급사들이 양질의 작품을 갖고 있어도 손익분기점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비디오 제작을 안 했다. 하지만 우리 대여점에선 그들의 작품이 워낙 인기가 좋으니 나중엔 배급사들이 우리 가게의 대여 실적, 추이 등을 역으로 연구했다.
- 영화를 보면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협약을 맺는 장면도 나오고, 이전에도 한국, 미국 등 수많은 학교에 킴스비디오의 컬렉션을 기부했다 들었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향한 애정이 남다를 것으로 짐작한다.
= 킴스비디오의 컬렉션을 매매의 대상으로 여겨본 적 없다. 내게 킴스비디오의 컬렉션은 라이브러리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보재로 흔쾌히 내줄 수 있다. 내가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영화를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필람할 영화가 학교에 있다 한들 대기 리스트에 늘 예닐곱 명이 포진해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알기에 기꺼이 학교별로 3~4만 개의 컬렉션을 내어줄 수 있었다.
- 과거 인터뷰 중 인상적인 발언이 있었다. 킴스비디오는 직접 문화를 ‘케이터링’하는 곳이라고.
= 손님의 입맛을 우리가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가 발굴한 새로운 외국 영화를 선보이는 ‘New Acquisition’ 섹션이 있었다. 신작들을 진열장에 올려놓아도 손님들은 이게 무슨 영화인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손님들에게 “우리가 케이터링한 영화가 맘에 들지 않으면 대여료를 환불해주겠다”고 말씀드렸다.
- 많은 영화인들이 킴스비디오에 대한 애정을 숱하게 고백해온다.
= 킴스비디오는 다른 곳이 하지 않는 무언가를 늘 실험했다. 우리는 타 대여점처럼 장르 구분으로 비디오를 진열하지 않았다. 가령 로맨스 영화들이면 진열장에 로맨스 대신 ‘소년, 소녀를 만나다’ 유의 이름을 붙였다. 킴스비디오에 오면 자기도 모르는 새 여긴 무언가 다르다는 기분을 느끼길 바랐다. 쿠엔틴 타란티노도 영화학교 대신 킴스비디오에 가면 된다고 할 정도였다.
- 킴스비디오의 우수 고객이었던 데이비드 래드먼 감독이 킴스비디오를 추적하는 과정이 영화 <킴스비디오>의 출발점이다. 그간 영화 제작도, 감독도 했지만 본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출연은 처음인데 래드먼 감독의 어떤 점에 반해 출연에 응했나.
= 2008년 킴스비디오가 문을 닫고 여러 곳에서 킴스비디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내 역량을 다 바친 곳이 디지털 기술에 밀린 것이 억울하고 분해 응하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년간 보관센터가 있는 이탈리아 살레미를 주기적으로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살레미 시장의 정치 스캔들이 난 것이다. 졸지에 컬렉션에도 문제가 생겨 걱정하던 차에 데이비드가 자신의 다큐멘터리로 킴스비디오에 관한 관심을 끌면 보관센터의 컬렉션을 다시 뉴욕으로 가져오는 좋은 기회지 않느냐고 제안하더라. 촬영 과정 중 데이비드의 협상으로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의 팀 리그 대표와의 협약도 성사되었다.
- 작년부터 살레미에선 킴스비디오와 함께 ‘씨네 킴 페스티벌’이라는 영화제를 개최한다. 올해 2회를 맞는 이 영화제에 관해 소개해준다면.
= 컬렉션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살레미의 청년들을 알게 됐다. 그들에게 우리 컬렉션을 바탕으로 무언갈 해보자고 제안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제와 이탈리아 작은 소도시에서 여는 우리의 영화제는 차별화가 필요하다. 인구 2만 명의 살레미도 이촌 향도 현상을 겪으며 인구가 1만 1천 명으로 줄었다. 이런 살레미의 현실 반영과 스탠리 큐브릭을 향한 나의 애정을 더해 영화제 콘셉트를 ‘오디세이(Odyssey, 귀향의 여정)’로 잡았다. 고향을 떠난 이들 혹은 그들의 후손이 다시 고향과 인연을 맺는 영화들을 초대하고 출품작들의 제작 지원까지 연계해주는 영화제다. 살레미에서의 움직임이 유럽의 여러 소도시들, 나아가 전 세계의 소도시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들이 직접 지역 영화제를 프로모팅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