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로 떠난 산행은 함께한 친구 한 명이 돌아오지 못하는 끔찍한 사고로 끝이 난다. 뤄이산 감독은 이 불행한 사건을 통해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이전으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이들의 삶을 재구성한다. 애도의 방식에 대한 섬세한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당신과 가까웠던 사람에게 실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결정한 순간은 언제였나?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완성하기까지는 길고 긴 과정을 거쳤다. 2017년 3~4월에 산에서 일어난 사고는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천쥔과 성웨와의 연락이 끊기고 나서 한 달이 넘어가자 나는 그들이 죽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의 준비를 했고, 그때 처음으로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충동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의 오프닝에 묘사된 것처럼 성웨는 살았으나 천쥔은 살아남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대만으로 돌아온 성웨를 만나러 병원을 찾아갔다. 성웨는 몸은 약해졌어도 자신감과 낙관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둘의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고 한 천쥔의 마지막 소원을 성웨가 내게 들려주었을 때, 우리는 천쥔의 유언을 기리자는 다짐을 하게 됐는데 그게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천쥔의 삶과 정신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성웨와 나의 긴밀한 협력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협력 과정은 우리 둘 다에게 필요한 애도의 형태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영화에도 묘사돼 있듯이 성웨와 나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갔다. 성웨가 영화 제작 중간에 이를 포기하고 나가면서 나는 갈팡질팡했다. 성웨와 결별하고 난 뒤 1년 이상 나는 이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할 동기를 재고하는 시간을 갖느라 영화 촬영을 중단했다. “내가 만약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 것이며 누구의 이야기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내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가 단지 천쥔의 유언을 기리거나 성웨의 곁에 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둘에게 일어난 산악 사고로 내가 얻은 트라우마에 직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게 트라우마 생긴 건 단지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여정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사고 결과를 알게 된 순간, 나는 그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그들이 겪은 것을 직접 경험하고 싶은 갈망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순진해 보이는 욕망은 그들의 여정과 천쥔의 인생 모두에서 내가 배제되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 깨달음이 천쥔과 성웨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가 실제로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다루는 서사로 영화를 구성하기로 결심하면서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이 프로젝트의 개발 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순간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예술의 형태로서 영화는 내게 천쥔과 성웨 두 사람의 여정에서 나의 부재로 생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평행 타임라인을 영화 언어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결정한 후에는 어떻게 작업을 시작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나?
2017년 산악 사고 이후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 실무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심지어는 카메라를 조작하는 법조차 몰랐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화 제작에 대해서 배웠다. 1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촬영한 후, 2018년 중반 30분짜리 버전으로 편집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의 장르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갖게 되면서 2019년에는 기금을 모으고 프로젝트를 함께할 파트너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네팔에서 촬영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계획을 연기해야 했다. 이때는 성웨와 내가 조금씩 멀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나는 갈피를 잃고 헤맸으며, 대학 졸업을 위해 촬영을 잠시 쉬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나는 많은 고민을 하고, 촬영한 영상을 정리하고, 이 영화에 대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2021년에는 서류의 내용대로 대만에서 일부 장면을 촬영했다. 2022년에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촬영하기 위해 네팔로 떠났다. 2022년 중반부터 2023년 9월 말까지는 영화를 편집했다.
성웨는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이지만 동시에 생존자이도 하다. 당신은 어떻게 성웨를 설득해 영화에 참여시켰나?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결정할 때 성웨와도 상의했나?
성웨와 나는 이 다큐멘터리에 대한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함께했다. 우리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 둘 다 천쥔의 절친한 친구였고 우리가 천쥔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는 데 있어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시작됐으나 접근하는 방식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사고 발생 반년 후, 성웨는 대만의 운무림에서 진행되는 여러 탐험과 연구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다른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다. 성웨는 영화에 출연할 의사는 있었으나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내 아이디어와 촬영 영상, 기금 신청용으로 편집한 예고편 등을 성웨와 늘 공유했다. 산악 사고 1년 후, 성웨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촬영을 꺼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그의 심리 상태를 완전히 알아챌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가 약 반년 정도 지속되면서 결국 우리는 이 영화와 우리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영화의 내러티브 중간에 이 부분을 포함시켰다.
우리는 서서히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네팔로 돌아가 동굴에 간다는 등의 영화 촬영 계획을 계속해서 성웨에게 알려주었다. 러프컷을 완성한 후에는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성웨를 영화에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줬다. 러프컷과 함께 상세한 편집 대본, 제안서, 홍보 또는 상영 계획, 전체 영화 자막을 담은 텍스트 파일도 그에게 보냈다. 또한 성웨가 영화에 묘사된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영화 내용도 짐작할 수 있게끔 성웨의 현 파트너와 가족들을 초대해 영화를 보여주었다. 성웨는 영화가 자신과 산악 사고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트라우마에 맞서는 나의 개인적 여정을 중심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안도했고,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독으로서, 또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천쥔과 성웨가 산에서 발견되었을 때의 비디오 영상을 보여줄 것인가 같은 것. 어떤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보여주는 데 두려움이나 편견은 없었나?
당연히 있었다. 사고 영상, 특히 구조팀이 그들을 발견한 영상을 보여주기로 한 것은 힘든 선택이었다. 내가 구조 영상을 받는 순간도 영화에 들어가 있다. 그때 나는 성웨와 함께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될 건지 알지 못한 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화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우리는 그 영상을 끝까지 다 보지 못했다. 성웨는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나는 혼자서 그 영상을 끝까지 봤다. 참혹한 사고가 기록된 영상을 처음으로 직접 본 것이니만큼 정신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이었으며 영상이 남긴 감정의 무게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구조 영상을 직시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감독으로서 나는 그 영상을 영화에 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넣어야 할지 철저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했다. 나에게는 그들이 동굴에서 발견된 모습이 담긴 영상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기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영상이야말로 전체 영화의 ‘핵심 이미지’였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이 장면과 연결되어 있었다. 편집 과정에서 내려야 했던 가장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는 이 핵심 이미지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네팔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의 명확한 전제를 설정하고자 이 영상을 영화 초반에 배치했다. 그 장면을 내가 동굴로 돌아가는 장면과 병치해 엔딩 장면에도 배치해 봤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접근법 모두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영상을 도입부에 배치하는 전자는 영화의 개인적인 스토리텔링 측면과 모순되는, 사고를 중심으로 한 조사 위주의 내러티브가 될 위험이 있었다. 반면 클라이맥스를 위해 영상을 맨 마지막에 배치하는 후자는 천쥔과 성웨의 경험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게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구조 영상과 뉴스 보도, 현재 상황을 파편적이면서도 일관성 있게 병치함으로써 사고를 드러내는 아예 다른 접근법을 선택했다. 이 스토리텔링 방식이 당시 내 실제 경험에도 더 가까웠다.
시작부터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영상과 기억을 반복해서 되새기는 건 고통스러웠나? 아니면 애도의 한 형태로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었나?
제작 기간으로 따지면 2017년 사고 직후부터 시작해 완성까지는 총 7년이 소요됐다. 물론 과거를 되새기고 엄청난 양의 촬영 영상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일이었다. 특히 두서도 없고 사소하며 무의미해 보이는 기억과 영상을 응집력 있는 내러티브로 바꾸는 부분이 어려웠다. 이 과정 내내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영화감독으로서의 관점과 입장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일이었다. 나는 자주 자문했다. “나는 이 사적인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의 나 자신과 내러티브 속 캐릭터 사이, 그리고 이 이야기와 내 경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하는 데 집중했다. 내 바람은 이런 거리 설정을 통해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내러티브에 동참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이 사적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감정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는 편집자 및 프로듀서와의 협업이 결정적이었다.
정신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 외에도 자기 소외를 피하고 정서적 민감성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영화 제작 기간이 꽤 길었기에 쉽게 지치고 감정적으로 무뎌지기도 했다. 마음가짐을 다잡고 적절한 거리를 두며 정서적 민감성을 유지하는 과정은 창작과 촬영 과정일 뿐 아니라 애도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차원에서 추억이 야기하는 아픔을 되돌아보는 것은 사실 애도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성웨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화를 만들었을까? (만약 그가 영화를 봤다면) 영화를 보고 뭐라고 했나? 그리고 당신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어땠나?
아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나와 편집자, 프로듀서는 영화에 성웨를 언급하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봤지만, 결국 내러티브에서 그를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건 실제로 성웨가 동굴에서 천쥔과 모든 걸 함께 겪고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 남아야 했던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성웨 없이는 이 영화를 만들 수조차 없었고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촬영한 성웨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산악 사고 후 내가 얻은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방식이 투영된 모습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래서 성웨에 대한 묘사는 사고 소식을 듣고 대만으로 돌아온 직후의 성웨를 따라갔다가, 그와 결별하고 홀로 네팔로 가는 나의 여정, 다시 말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내 여정의 연대기적 서사를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나는 성웨와 내가 가진 차이의 또 다른 측면과 이 차이가 왜 우리 관계에 불가피한 틈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성웨의 트라우마는 그가 천쥔과 함께 동굴에 있으면서 그 모든 걸 직접 경험한 데서 비롯된 반면 나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경험에서 내가 부재하고 배제된 데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 존재와 부재 사이의 심오한 차이는 우리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초래했다. 영화 속 인터뷰에서 성웨가 말하다시피 당시 동굴에 있었던 그에게 네팔로 돌아가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일종의 애도이면서 동시에 당시 상황을 다시 겪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나는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화해하기 위해 사고가 난 장소에 실제로 가 볼 필요를 느꼈다. 내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방식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성웨 같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이러한 변화와 차이를 포착하는 것이 내러티브의 실질적이고 중요한 측면이다. 성웨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고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도 없다.
이 영화에는 뤼크 베송의 영화 〈그랑블루〉(1988)에 대한 언급을 통해 영화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당신 사무실로 보이는 공간에는 빔 벤더스와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문학의 존재감도 드러나 있다. 수전 손태그의 『타인의 고통』이 언급되고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 군(郡)의 열두 달』도 플롯상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들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조금 말해 달라. 특히 알도 레오폴드의 책에 관해서.
문학, 영화, 성웨와 함께 떠난 산행은 천쥔과 나를 숨 막히는 학업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들이다. 우리가 사랑한 많은 작품들 가운데 〈그랑블루〉는 산을 막 탐험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자크가 “(바다 맨 밑에서)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그리고 그걸 찾는 게 너무 어려워.”라고 하듯이, 우리에겐 산에서 내려와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 영화는 자연에서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당시 우리는 마찬가지로 거기에 매료됐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산에서 죽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 군(郡)의 열두 달』은 천쥔과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 〈그랑블루〉가 이상주의적이고 순진한 방식으로 자연을 경험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던 반면 『모래 군(郡)의 열두 달』은 산의 냉혹함과 가혹함을 보다 미묘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 장엄한 지형에 접근하는 방법을 항상 탐구해왔다. 우리가 산에 투영하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산은 우리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로 이루어진 중립적인 실체로 남아 있다. 알도 레오폴드는 이 같은 불멸의 역설과 함께 냉혹하고 무자비한 산이 어떻게 “세계의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묘사했다. 천쥔이 동굴에 갇혔을 때 산의 본성인 냉혹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처럼. 이것이 내가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와 직면하면서까지 산을 마주하고 동굴을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트라우마의 수용이 애도라는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산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이며 산의 냉혹함과 죽음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포스터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내가 영화 세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십계 The Decalogue〉(1989~1990) 중 5화와 6화는 대학 입시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에 내게 영감을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빔 벤더스의 영화를 포함해서 수많은 고전영화를 봤다. 빔 벤더스가 자신의 저서 『한번은』에서 밝힌 “사진 찍기는 앞뒤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행위”라는 개념은 나의 관점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눈이 녹은 후에〉를 만들면서 이 점을 많이 생각했다. 수전 손태그의 『타인의 고통』은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 이미지와 이미지가 제시하는 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진에 관한 에세이의 고전이다.
영화에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과거가 과거일 뿐.”이라면 모든 영화와 다른 형태의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모두에 둘러싸인 존재이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이 말과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들과 소통하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영원히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이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