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목적지는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라는 영화 속 인물의 말은 영화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찾아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 싱가포르로 향하는 주인공 반자이 미쓰에가 겪는 모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찰이 되기도 한다.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로 감독 데뷔하기 전 촬영감독으로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언젠가는 감독이 될 생각을 갖고 있었나? 아니면 영화계에서 일하면서 연출 데뷔의 필요성을 체감했는지 궁금하다.
대학 졸업반 때 단편영화를 연출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제도적인 지원이 부족함을 절감했다. 싱가포르에는 지금도 영화에 전념하는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 편집자, 사운드 디자이너, 컬러리스트가 많지 않다. 광고나 TV 프로그램 등의 작업을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작업을 할 때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가 영화에서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기술, 새로운 스타일 등을 탐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졸업 후에 감독들이 영화에서 원하는 걸 성취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스태프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그 과정에서 K. 라자고팔, 랴오제카이, 니콜 미도리 우드퍼드 같은 훌륭한 감독들과 작업하는 특권을 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는 걸 느꼈고, 그게 기본적으로 내 영화를 만들 용기를 주었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영화가 당신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둔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
영화에서 주인공 반자이는 싱가포르라는 낯선 나라에 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일본으로 이주해 거기에서 거의 5년을 살았다. 일본으로 간 것은 일본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싱가포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싱가포르에서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감행하면서 인생에서 많은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서 사는 동안 나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망가진 관계가 준 파장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게 의미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생긴 감정에 직면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내 감정에 직면할 수 없었던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첫 영화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은 그래서 만들게 됐다. 내가 외국에 갔다가 결국은 싱가포르로 돌아왔듯이 반자이도 싱가포르에 살다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서 반자이는 내가 하고자 했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다. 여성의 세계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다면?
대체로 여성 캐릭터가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기로 한 진짜 이유는 영화 자체가 내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캐릭터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목적지는 상관없을지도 모른다.”라고 영화 속 캐릭터가 말하고, 영화도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우리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주인공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주인공의 여정을 좇는다. 영화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로는 시나리오 없이 작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작업했나?
실제로 사전에 쓰여진 시나리오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게 영화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촬영할 내용과 관련해서는, 나는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주인공 반자이는 영화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두 여성 캐릭터가 일하는 이자카야는 반자이가 실제로 일하는 곳이다. 영화 후반부에 반자이는 홋카이도로 돌아가는데, 우리는 반자이의 실제 부모가 등장하는 그 장면을 실제 그의 집에서 촬영했다. 반자이도 이 영화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우리는 촬영 시작 1년 전부터 함께 작업을 했다. 반자이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해질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반자이가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과, 반자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목표를 가지고 영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그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예를 들면 텅 빈 수영장 신에서 나는 남자 캐릭터인 도리타니가 반자이에게 재결합을 하고 싶은지 물을 때 반자이가 동의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촬영 과정에서 반자이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최종 편집본에 이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반자이가 이 장면에서 내린 결정은 이 영화가 내가 의도한 것과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완성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화가 매우 절제되어 있고 섬세하다. 당신은 본인의 영상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인가? 아니면 장소와 배우의 요구에 따라 조정하는 편인가?
영화가 주는 느낌과 모양새는 촬영감독으로서 내 선호도가 반영된 결과인 것 같다. 시나리오가 없었기에 촬영 현장에서는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배우가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를 보완하고자 촬영장에서는 조명을 쓰지 않았다. 나는 배우가 자유롭게 움직이길 바랐고 그 점은 매우 중요했다. 로케이션도 중요했다. 이미 말했듯이 정말로 로케이션에서 출발해 전체 촬영을 구상했다. 내가 직접 로케이션 헌팅을 나갔고 특정 로케이션에서의 촬영을 결정했으며, 그런 다음 그 로케이션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나에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영화의 영문 제목이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 My Endless Numbered Days’이다. 이 표현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어떤 감정을 묘사하는 것 같다. 당신의 영화가 현세대의 어떤 감정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나?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가 청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느끼는 감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젊은데 어쩐지 시간이 고갈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영화는 또한 ‘쿼터라이프(20~40세 사이 젊은 층을 지칭하는 말) 위기’도 다루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위기가 아닌 위기’로 정의하고 싶다. 우리는 ‘사회적 규범’에 휩쓸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꽤 황당하고 재미도 있다.
연출은 계속할 계획인가? 작업하고 있는 신작 프로젝트는 있는지?
계속할 계획이고 현재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것도 여전히 좋아해서 그 일도 계속할 것이다. 홍콩에서 다음 프로젝트가 있고, 아날로그 필름 촬영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오는 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개최되는 ‘테레 디 시네마’의 35mm 워크숍에도 참석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전주에 머물면서 새로운 감독들도 많이 만날 것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촬영하는 프로젝트가 생길지도!